벽돌 한 장에도 역사가 숨 쉬는 명동성당 이야기”
명동성당의 역사와 나의 신앙여행
서울의 한가운데, 늘 붉은 벽돌이 묵묵히 서 있는 곳이 있다.
명동성당.
그곳은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믿음의 집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기억을 품은 살아 있는 역사다.
처음 명동성당을 찾았을 때, 나는 그 벽돌 하나하나에 묘한 숨결을 느꼈다.
1900년 이전의 서울, 전차도, 빌딩도 없던 시절,
이 자리에 교회를 세운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며, 그들의 손끝에서 쌓인 벽돌은
오늘날까지도 ‘믿음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신앙의 뿌리, 명례방의 기억
명동성당이 자리한 이곳은 본래 ‘명례방’이라 불렸다.
박해의 시절에도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몰래 기도하고 서로의 안부를 나누던 작은 마을.
그 마을의 중심에 세워진 성당은
한국 천주교가 ‘박해의 신앙에서 자립의 신앙으로’ 나아간 상징이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첨탑이
마치 시대를 뚫고 하느님께 손을 내미는 듯하다.
고딕 양식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기도의 빛처럼 공간을 물들이며 조용히 속삭인다.
민주화의 성지, 침묵의 외침
명동성당은 단지 신앙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1987년, 거리마다 최루탄이 흩날리던 그 시절,
학생들과 시민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성당은 그들을 품었다.
‘하느님의 집은 폭력의 현장이 될 수 없다.’
사제들은 문을 굳게 닫고 그 안에서
기도로 시대의 고통을 함께 끌어안았다.
명동성당이 한국 현대사 속에서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오래된 건축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곳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마지막 보루로 기억되는 곳이다.
1987년 6월, 전국이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으로 들끓던 시절,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경찰의 강경 진압을 피해
명동성당 안으로 몸을 피했다. 그날 성당 안에는 천 명이 넘는 이들이 밤새도록 농성을 이어갔고, 성당 밖에서는 경찰이 진입을 시도했지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이를 막아서며
“이곳은 하느님의 집이며, 폭력이 들어올 수 없는 성역”임을 선포했다.
그날의 선택은 단순한 피신이 아니라, 신앙과 양심으로 시대의 고통을 품은 행동이자 저항이었다.
며칠간 이어진 농성 끝에 정부는 무력 진압을 포기했고,
결국 국민적 여론이 결집되면서 6월 29일 ‘직선제 개헌’ 선언으로 이어졌다.
그날 명동성당을 가득 채웠던 침묵과 기도의 시간은
결국 한 나라의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외침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명동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면,
그날의 떨림과 함께 “신앙의 양심이 역사를 움직였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 침묵의 외침은 결국 한 나라의 민주화를 이끌었다.
그래서 명동성당의 종소리는 단순한 예배의 알림이 아니라,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위한 선언”이었다.
오늘의 명동성당, 평화의 쉼터
지금 명동성당은 바쁜 도심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나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는 장소다.
어떤 이는 묵주를 들고 기도하고,
어떤 이는 그저 벤치에 앉아 세월의 숨결을 느낀다.
성당 뒤편 지하 묘소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잠들어 있고,
그들의 이름 없는 신앙이 오늘의 믿음을 세웠다.
나는 그 앞에 서면 늘 마음이 정화되는 듯하다.
그 오래된 돌계단을 오를 때마다,
마치 나도 그들의 신앙의 한 조각이 되는 기분이다.
“명동성당은 벽돌로 세워졌지만,
그 벽돌 하나하나에 신앙과 자유, 그리고 사람의 존엄이 새겨져 있다.”
에필로그
명동성당을 나서며 바라본 명동 거리는 늘 분주했지만,
그 중심에 있는 성당은 언제나 고요했다.
삶이 바쁘고 마음이 흔들릴 때면 나는 그 붉은 벽돌 사이로 들어가 기도처럼 오래된 시간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변하지 않는 믿음을 다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