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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에서 배운 마음의 무게

백운대로 가는 길, 마음의 높이를 배우다

백운대에서 만난 마음의 경계선


북한산성에서 백운대로 이어진 하루의 기록


산행을 나선 아침, 하늘은 물기를 잃은 수채화처럼 담담했다.

햇빛도 바람도 과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던 날.

그 덕에 내 마음의 결이 또렷이 드러나는 시간이 되었다.


뉴질랜드 트래킹을 앞둔 친구와 나는

조용한 ‘예행연습’처럼 산을 올랐다.

발밑에서 흙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

숨이 가쁜 순간마다 폐 깊숙이 살아 있는 공기가 들어왔다.

이 정도면 준비가 되고 있다는 확신,

그리고 어딘가로 함께 향하고 있다는 믿음이

한 걸음 한 걸음을 단단하게 지탱해 주었다.

그러나 어느 지점부터 산의 분위기는 조금 달라졌다.

가파른 바위길에서 갑자기 몰려든 외국인 관광객들.

백운대는 요즘 한류 영향으로

세계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기대와 반가움이 절반,

그러나 현실은 조금 다른 방향에서 다가왔다.


좁은 구간을 먼저 지나야 할 이가,

먼저 오르고 있는 이를 향해

조금의 시선도, 멈춤도 내어주지 않는 그들.

누군가는 웃으며 밀고 지나갔고,

누군가는 다급히 길을 점령했다.

그 순간 내 마음 어딘가에서

가볍게 긁히는 소리 같은 감정이 일었다.


‘예의’라는 단어가 얼마나 조용한 힘을 가지는지,

그날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산은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 공간인데,

그 자유로운 공간조차 누군가의 성급함에 의해

점령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서늘했다.

나는 괜히 기분이 상했고,

잠시 걸음을 멈추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기도 전에,

불쑥—정상석 앞에서 또 다른 무례가 내 시야를 가로질렀다.


가파른 바위 위, 쇠줄을 잡고

순서를 기다리며 조심스레 서 있는 등산객들을

거침없이 가로질러 올라서는 이들.

그들은 마치 자기 차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가

단 한 장의 인증숏을 위해

모든 흐름을 뒤흔들어놓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짧고 얇은 “아…”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짜증, 당황, 어이없음—

감정들이 뒤섞여 목 울림을 타고 미끄러져 나온 소리.

그 소리가 내 속마음을 너무 정확히 대변하고 있어서

나 스스로도 조금 민망해질 만큼이었다.


숨을 밀어 올리며 뱉어져 나온 그 소리는

억눌린 짜증, 놀람, 당혹함이

한꺼번에 뒤엉켜 터지는 소리였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그 순간 내 감정의 무게가 정확히 실린 소리이기도 했다.


바람이 그 소리를 들고 지나가는 동안,

나는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문득, 여행자로서의 나를 떠올렸다.

타인의 나라에서 나는 과연

저렇게 누군가의 흐름을 깨뜨리지는 않았을까—

그 질문이 천천히, 그러나 깊게 마음속으로 내려앉았다.


외국에서 내가 여행자였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나라에서 나는 얼마나 조심스러웠던가.

길을 비켜주고,

눈인사 하나에도 마음을 담고,

천천히 묻고 또 기다리며,

나는 그저 ‘좋은 여행자’이고 싶었다.


오늘 만난 이 작은 불편함은

나를 향한 조용한 질문 같았다.


“그렇다면 너는, 타인의 나라에서

정말 좋은 여행자였을까?”


그 질문이 산사면에 오래 맴돌았다.

백운대 정상에서 본 서울의 흐릿한 윤곽은

흩어진 생각을 다시 한 곳으로 모아주었다.

바람이 지나가며 “이 또한 지나갈 일”이라 속삭이는 듯했고,

나는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길을 비켜주고,

눈인사 하나에도 마음을 담고,

타인의 흐름을 깨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평온한 흐름을 건너뛴 적은 없었을까.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은

여전히 부드러운 실루엣으로 서 있었다.

바람은 귓가에서 가볍게 흩어졌고,

한낮의 빛은 도시와 산을 동시에 어루만졌다.


오늘의 산행은

친구의 뉴질랜드 트래킹을 위한 준비이면서도,

나의 태도를 되짚는 조용한 훈련이었다.

산은 늘 말없이 가르친다.

어떤 마음으로 길을 오를 것인지,

또 어떤 태도로 타인을 지나칠 것인지.

한 걸음에 마음을 얹고

한 순간에 나를 비춰보는 일.

산은 늘 그런 방식으로 나를 가르친다.

그 배움을 안고

나는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오늘의 발걸음은 조금 더 묵직했고,

그만큼 더 단단해진 마음이

내 안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타인의 나라에서 나는

어떤 여행자였을까를 떠올렸다.

흐름을 깨뜨린 적은 없었는지,

누구의 평온을 모른 채 지나친 적은 없었는지.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배웠다.

여행자는 어디에서든

자신의 마음결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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