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줘

by 엘레강스박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를 만나 만화카페에 갔다가 늦은 점심을 함께하고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4시였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려면 아직 30분이 남아있었다.

나는 터미널 대합실 의자에 앉아 웹소설을 읽었다.

주인공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되어 어벙벙한 상태에서 부딪힌 사람과 마악 대화를 하려는데

"저기 학생......"

옆에서 누가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더니, 눈웃음이 귀여워 보이는 할머니가 앉아있었다.

대합실은 한산했고 빈자리도 많았는데 그녀는 굳이 내 옆자리에 있었다.

"중학생이야, 고등학생이야?"

"고등학생이에요."

중학생이라니, 발끈해진 내가 대답했다.

"3월에 대학생 되어요."

나는 쐐기를 박았다.

"여기 XX대 가는 거야?"

"아니요, 여기는 친구 만나러 왔어요."

말하고 나니 아차 싶었다.

엄마가 낯선 사람과 함부로 말 섞지 말랬는데.

어서 일어서야겠다.

이렇게 눈이 귀여운 할머니가 무슨 나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마는.

"좋겠다, 이제 성인이네."

내가 자리를 피하려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황급히 나의 팔을 잡았다.

"내가 버스비가 8,500원 모자라서 그러는데 돈 좀 줄 수 있어?"

나는 내 지갑을 떠올렸다.

2만 원이 있을 것이다.

아침에 나오면서 버스카드 충전할 돈 없다고 엄마에게 거짓말하고 만원을 받아 충전했으니,

그 돈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 저 돈 없어요."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며 자신 없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도와줘. 나 집에 못 가서 그래."

다시 거짓말할 자신이 없어서 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꺼내 열었다.

그리곤 그녀에게 만원을 내밀었다.

"2만 원 다 주면 안 돼? 점심도 못 먹어서 그래."

언제 내 지갑 속을 들여다보았는지

여태껏 웃음 짓고 있던 눈이, 먹잇감을 노리는 번뜩이는 맹수의 눈이 된 그녀가 뻔뻔하게 말했다.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지갑을 닫자,

그녀는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벌떡 일어서더니 고맙다는 말도 없이 가버렸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사연 있는 여자처럼 울었다.

너무 바보 같고 숙맥 같은 내가 싫어서였다.

엄마에게 거짓말해서 벌 받은 건가 싶기도 하였다.

차창 밖을 보았다.

어느덧 해가 넘어가 세상이 어스름해지고 있었다.

또 눈물이 났다.

버스가 도착하기 전에 감정을 추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야,

여리디 여리고 세상물정 모르는 나의 딸.

그 일은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

네가 해코지당하지 않고 아무 일 없는 그것으로 고맙다.

그러나

네가 헤쳐나가야 할 쓰디쓴 세상에 엄마가 더 두렵구나.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불량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