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분야에서 여성이 소수일 때

소수일 때의 난처함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내가 일하는 분야는 남자가 많은 편이다. 여자는 항상 소수였다.


나는 학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90년대 말, 내가 유학을 가던 해에 유학을 갔던 학교에는 한국에서 온 여자 유학생이 총 5명이었다. 전공은 다 달랐지만 어쨌든 여자 한국유학생으로는 이례적으로 많은 수였다. 당시 학교에 있던 여자 한국유학생 전체 수보다 많았다. 그러나 끝까지 학위과정을 마친 여자는 나 하나였다. 중간에 결혼을 해서 공부를 그만두거나 시험에 통과되지 못해서 그만두는 등 다양한 이유였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도 남자가 많은 분야에서 여자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았다. 너무 튀어도 안되고 너무 나약해도 안된다. 너무 남자 같아도 안되고 너무 여자 같아도 안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평등 개념이 들어오면서 여자를 구색 맞추기로 끼워넣는 분위기가 생겼다. 여자는 소수이기 때문에 오히려 특혜를 받는다는 눈초리도 있었다. 여러 상황이나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려울 때가 많았다.


소수일 때는 여러가지 난처한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직장에서 해외연수를 가게 되어 내가 아이를 데리고 1년간 미국으로 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다. 남편은 직장 때문에 같이 가지 못해서 나와 아이만 가게 되었다. 대부분은 남자분의 직장 때문에 가족 단위로 연수를 왔는데, 여자의 직장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온 겨우도 나 하나였다. 다양한 직종과 분야에서 해외연수를 온 한국분들과 모임을 하면 나만 홍일점이었다. 그래도 같은 자격으로 온 상황이라 그런대로 남자분들과 잘 어울렸다.


한번은 해외연수를 온 한국분들 가족모임이 있었다. 이때 난처한 상황이 생겼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여자분들은 wife의 자격으로 온 분들이고 나만 그분들의 남편과 같은 자격으로 온 여자였다. 남자분들은 별 생각없이 평소와 다름없이 나를 자기들 틈으로 부르며 같이 앉아서 대화하고 밥을 먹자고 하는데, 그분들의 부인들은 모두 음식을 하며 나르고 있었다. 정말 난감했다. 다행히 거기 계신 부인들이 다 성격이 좋으셔서 나한테는 그냥 남자분들과 같이 앉아서 밥을 먹으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불편했다. 그래서 요령껏 음식을 나르면서 부인분들과 얘기도 했다가 남자분들과 앉아서 밥을 먹기도 하다가 왔다갔다 하느라 정신없었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사소한 상황에서도 남자는 겪지 않을 문제를 여자가 소수이기 때문에 겪었다. 지금은 이런 일이 많지 않겠지만 아직도 어떤 분야에서는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럴 때 현명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잘 처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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