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햇살 같은 너를 기다리며」)
아이들은 관계를 갈망한다. 생애 처음 맺는 부모와의 애착은 관계의 기본이다. 그러나 부모는 종종 수직적 관계로 다가오기 때문에 아이들은 커가면서, 보다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게 된다. 비밀을 공유하고 모험을 감행하며 그 안에서 돈독한 감정을 다져가는 또래야말로 아이가 맺는 관계 중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관계일 것이다. 그리고 때로 아이들은 또래와 있을 때 더욱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외국에서 온 아이’인 페드로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어렵다. 누구도 페드로의 친구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부색이 다르고 말이 어눌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학교 복도에 무리 지어 서 있거나, 오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페드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다양한 피부색과 머리 색, 독특한 머리 모양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어서 페드로가 눈에 더 잘 띄는 것도 아니다. 친구 한 명이 더 생기는 것에 관심이 없거나, 굳이 사귀어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리라 추측해 본다. 이미 정도의 친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 관계 안에 새로운 아이 들이기를 굳이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리라.
아이들은 다양성에 훨씬 더 열려 있다. 다양성의 의미가 무색하게 그들의 사고는 무지개색으로 펼쳐져 있곤 한다. ‘다름’은 일상적이며 편견 가지기가 되려 고민스러울 정도이다. 그래서 “외국에서 온 아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떤 아이도 친구가 되어 주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글과 이 글을 표현한 그림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록 페드로가 중심부에 오도카니 서서 곁눈질로 아이들을 살피고, 한두 아이가 그런 페드로를 흘깃 쳐다보고는 있지만, 따돌렸거나 일부러 혼자이게 만들려는 의도는 찾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페드로에게는 친구가 없다. 아직 사귀기 전이라고 독자는 믿고 싶어진다.
페드로의 외로움 뒷면에는 더 나은 삶을 위해 타국으로 이주한 부모가 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따라 이민 가면서 정든 고향과 친지, 모국어를 등져야 한다는 사실이, 오래지 않은 삶이라 해서 덜 아픈 것은 아니다. 친구를 두고 떠나면서 그와 같은 돈독한 관계가 새롭게 다가올는지 기약 없는 아이는 마냥 친구가 아쉽고 그립기만 하다. 친구의 축하 없이 맞아야 하는 이번 여덟 살 생일이 더없이 쓸쓸한 이유이다. 페드로는 생일선물로 친구를 간절히 원한다. 학교에서 친구 사귀기를 체념한 페드로가 발견한 대체 친구는 장난감 가게에 진열된 로봇이다. 또래 아이의 얼굴을 한 로봇에게서 페드로는 친밀감을 느끼며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눌 기대를 갖는다. 그리고 마음을 나눌 희망을 품는다.
이주노동자로 삶이 여유롭지 않은 부모는 페드로의 생일선물, 아니 친구를 사주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한다. 고된 노동으로 여위어가는 아빠의 피로한 얼굴 한편으로, 로봇을 사기 위해 마련한 작은 항아리에는 돈이 제법 쌓여간다. 그렇게 생일이 내일로 다가오고 드디어 로봇을 살 수 있게 된 날, “페드로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집 안 광경에 깜짝 놀랐어요.”라고 글이 안타깝게 전달한다.
편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어른들이 능동성을 발휘하면 ‘다름’을 ‘잘못’으로 패대기친다. 페드로의 집을 엉망으로 만들고 항아리의 돈을 훔쳐 갔으며, 벽에 이민자에 대한 혐오 글을 남기는 방식으로 말이다. 격앙되어 꿈틀거리는 벽 글씨에 페드로는 혼란과 불안을 느끼고, 그런 아이에게 아빠는 “이민자가 되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야.”라며 그릇된 생각을 가진 어른들의 난폭한 행동에 차분함으로 대응한다. 몸을 움츠리고 아내와 아이를 끌어안은 가장의 눈빛이 어수선한 방 안의 모습처럼 방향을 잃고 머뭇거리다 상심에 기운다.
친구가 필요한 건 아이만이 아니다. 어른인 아빠, 엄마도 함께 일할 동료가 필요하고 마음을 나눌 친구가 있어야 하며, 도움을 주고받을 이웃이 힘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먼저일 텐데, ‘이민자’라는 낙인이 가족의 삶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면서 모든 관계를 부정당한다. 페드로의 어려움은 가족 모두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었다. 앞서 페드로가 친구 사귀기가 어려운 것이지, 아이들이 페드로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는 해석은, 미성숙한 어른들의 광폭한 난동에 맞서 페드로 가족이 타국에서의 고단한 삶을 이어갈 한 줄기 희망으로 아이들의 열린 받아들임을 포착하고 그것에 기대어 볼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림책은 페드로가 드디어 친구를 찾고 행복한 또래 관계를 맺는 것으로 결말짓는다. 아빠, 엄마 역시 친구의 부모와 좋은 이웃 관계가 되었으므로 두말할 나위 없는 해피엔딩이다. 한 가지 아쉬운 건, ‘킴’이라는 이름의 동갑내기 친구가 동양인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브라질에서 온 페드로의 갈색 피부보다 한결 밝은 황토색 피부와 생김새, 그리고 이름에서 유추해 볼 때 그러하다. 이 그림책 저 너머, 또 다른 그림책에선 ‘킴의 친구 찾기’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어찌 되었든 페드로와 킴은 기다리던 친구를 만났고, 서로에게 ‘햇살 같은’ 존재로 오래오래 정다울 것이다.
‘이민자의 아이는 이민자의 아이와 친구가 된다.’라는 설정을 통해 작가는 정착민에게 수용되고 그들의 아이와 자연스럽게 교우관계를 형성한다는 억지스러움으로 이야기를 동화처럼 미화하고 싶지 않았음을 은근히 드러내는 듯하다. 어쩌면 브라질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한 작가 ‘빅터 산토스’의 자전적 이야기일 수도 있으리라. 삶의 매 국면이 동화 같을 수는 없겠으나, 동화의 행복한 결말과 비슷하게 닮을 가능성은 열려 있다. 이 그림책의 결말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