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시대의 순수

(그림책: 『나의 로봇 친구 봇』)

by 안은주

2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는 소위 컴맹이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노트북으로 여가를 즐기는 지금의 생활로 본다면 컴퓨터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어느 때부턴가 길에 나가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거나, 은행 창구 앞에서 순서표를 쥐고 대기하는 대신 집안에서 스마트폰 앱을 켜면서 신속하고 편안한 처리가 주는 안락감을 의당 그래왔던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상냥하게 주문을 받는 점원 대신 키오스크를 마주할 때면, 익숙하지 않은 메뉴의 배열과 결제 절차에 버벅대며 누가 볼세라 진땀을 흘리기도 한다. 익숙한 것과 덜 익숙한 것의 차이일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문명은 드디어 인간과 상호작용이 가능한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단순히 인체의 형태를 닮은 겉모습뿐이거나, 인간의 업무를 대신하는 용도에서 나아가 인간의 말을 이해하고 사고를 흉내 내며 질문에 걸맞은 답변을 내놓는다. 기술의 발전이 가전이나 자동차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이기에 적절한 통제를 통해 문명의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람 모습을 하면서 내 생각에 조응도 하는 기계라니... 뜻밖의 도플갱어를 마주한 듯, 묘한 위협이 밀려든다.


아이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살아있다고 믿는다.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처럼 보고 듣고 움직이며 말을 하고, 음식을 먹으며 잠을 잔다고 생각한다. 이를 ‘물활론적 사고’라고 한다. 동식물과 대화를 나누고 해와 달에 인사를 건네며 블록과 인형에 이름을 붙인다. 세상 만물이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의 행동을 우리는 ‘순수’라고 표현한다.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이 그림책 표지에서 그 순수한 아이와 마주한다. 아이는 로봇과 손을 잡고 있다. 제목이 이미 ‘로봇 친구’이다. 친구가 되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아이가 선언하고 있는 듯하다.


솔방울을 줍던 아이는 로봇을 만난다. 자연스럽게 아이의 입에서 “우리 같이 놀래?”가 튀어나온다. 학교나 놀이터에서 또래에게 하듯이 말이다. 숲에서 재미있게 놀다 언덕을 구르게 되었는데 아이는 별 탈이 없었던 반면, 로봇은 스위치가 바위에 걸리는 바람에 그만 전원이 꺼지고 만다. 넘어진 채로 아무런 움직임도 반응도 없는 로봇. 아이는 당황한다. 걱정 어린 물음에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다. 전원이 꺼진 로봇은 쇳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이가 알 리 없다. 아이는 같이 놀던 친구를 두고 갈 수 없다. “내가 도와줘야겠다.”라며 친구를 위로한다.


숲에서 힘겹게 로봇을 끌고 집으로 데려온 아이. 배고플까 봐 수프를 떠먹여 주고 심심할까 봐 그림책을 읽어준다. 잘 시간이 되자 이불을 덮어 주곤 상냥하게 “잘 자.”라고 속삭인다. 그러곤 아이도 침대에 누워 잠이 든다. 아이가 잠이 들었는지 살피러 엄마, 아빠가 방문을 열자 때마침 문 뒤에 있던 로봇의 스위치가 문에 부딪히며 전원이 켜진다. 로봇의 눈에 아이의 모습이 먼저 들어온다. 낮에 함께 놀았던 아이. 로봇에게도 아이는 친구이다.


잠이 들어 움직임이 없는 아이를 로봇은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 생각한다. 로봇의 입에서 “내-가-도-와-줘-야-겠-다.”라고 다정한 기계음이 흘러나온다. 집으로 데려간 로봇은 아이에게 기름칠을 해 주고, 로봇 사용 설명서를 읽어주며 아이가 다시 움직이길 기다린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보조 배터리도 준비한다. 로봇의 행동을 제지하는 발명가의 외침에 잠에서 깬 아이는 살아 움직이는 로봇을 마주하곤 활짝 웃는다. “너, 다 나았구나!” 로봇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웃는 아이를 보며 눈을 빛낸다. “너-고-쳐-졌-구-나!”


아이가 로봇에게 준 인간적인 도움과 로봇이 아이에게 한 기계적 도움은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이다. 자기 관점에서만 바라본, 아집에서 나온 것이었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와 로봇의 행동이 무지함과 위험천만함으로만 비치지 않는 건, 그런 행동 이면의 마음이 독자에게 보이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로를 보살피고 아끼며 아픈 로봇이 낫고, 고장 난 아이가 고쳐지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 친구란, 상대를 소유하려는 욕심이나 가두어 통제하려는 구속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에게 즐거움으로 유익할 수 있고 행복감으로 진일보할 수 있는 관계임을 보여준다.


나를 도와주던 기계가 나를 압도하여 삶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상상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발전된 기계가 자꾸 세상에 던져져 나올 때, 익숙하지 않은 조작법과 피부에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이 더더욱 우리를 위축시키고 뒷걸음치게 한다. 그러면서 등 돌리고 모른 척, 살 수는 없기에 뒤적뒤적 만져가며 머리와 몸이 적응해 가는 사이, 우리는 그것이 없던 시간들을 불편한 시절이었다고 기억한다.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적응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쓸모가 있어, 곁에 두고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여가를 늘렸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이 그림책에서 아이와 로봇이 친구가 된다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단순한 관계 설정은 아동용 이야기 그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 어린아이의 물활론적 사고와 순수한 마음이 로봇을 대하는 태도는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고 옳지 않은 일에는 쓰지 않겠다는 정의와 윤리에 관한 것이다. 인간 대 인간에서, 인간 대 기계가 될 세상으로 나아갈 때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준비되어 있어야 할 도덕 요소일 것이다. 기계에 도덕 운운이 시답잖아 보일지 모르나, 나를 닮은 도플갱어가 닮음의 유용성으로 나를 이롭게 할지, 나를 대체하는 위협으로 다가올지는 그것을 사용하는 마음의 파동이 결정한다. 험악한 마음으로 잘못 사용한 기계는 인간의 삶을 혼란에 빠트린다. 휴머노이드 로봇의 반격은 영화감독의 상상력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점점 더 진화된 로봇을 만든다. 사고하는 로봇이 인간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면서 한편으론 ‘친구’라고 부르고 싶은 욕구를 가질 수도 있다. 상호작용이 가능한 로봇과 인간 사이에 어느 범위까지의 관계가 인정되고 허용될 것인지 머지않아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만나면 즐겁고 행복한 관계로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것인가. 뒤표지에서 작가의 다소 냉담한 시선이 담긴 그림을 만난다. 뒤돌아선 로봇과 아이는 손을 잡고 있지 않다. 그리고 명확하게 눈에 들어오는 사실 하나, 스위치가 부착된 로봇의 등과 매끈한 아이의 등이다. 닮아 보일지라도 존재의 근본적인 차이는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이 보기 적절하게 큼직하고 산뜻한 색상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기계인 로봇마저 마음 푸근한 인상으로 다가오도록 한다. 어린아이들의 시선에 영락없는 ‘친구’의 모습이다. 독자의 눈에는 어떤 모습일지 의견이 듣고 싶은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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