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신미 Oct 11. 2023

산책길에서

영랑호 일기

영랑호 나이는 팔천 오백 년쯤. 그쯤이면 산이 할아버지 되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물이 될 수 있는 세월이다. 갈대늪 깊숙한 그늘 속에 생명의 예감이 꿈틀대는 물가, 그러니까 고니나 개개비나 민물가마우지도 때 되면 들러가고 숭어나 전어 또는 황어도 철마다 떼 지어 찾아오는 것이리라. 무엇보다 울산바위를 가운데 두고 창창하게 어깨를 치켜든 산봉우리들이 그 물에 이마를 씻는 아침이면, 무엇이든 품고 삭여서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전설의 여신이 떠오른다. 나는 언제쯤 산이 되고 물이 될는지.

코비드로 혼자 머물러야 했던 때부터 영랑호 둘레길을 천 번도 넘게 걸었다. 한 바퀴 돌면 약 칠, 팔 킬로, 한 시간 반, 일만 걸음이다. 매일 걸어도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를 보듯이 새롭게 기대되는 산책길이다. 운동하려 애쓰지 않고 마음을 물처럼 풀어놓은 채 걷노라면 매번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세세하게 눈에 들어온다. 입구의 전나무 숲과 그리고 길 양옆으로 늘어선 벚꽃나무나 산수유들, 철쭉과 은행나무, 무성한 억새풀, 그 사이사이 풀잎과 돌들 까지도 표정만 봐도 그날의 기분을 알아볼 만큼 익숙해졌다. 철새들이 제각각 자리 잡곤 하는 장소도 알고 있고, 물고기가 떼로 모여드는 저물녘 시간도 알아맞힐 수 있다. 왜가리 떼 왜 왜 하는 불평을 머리에 이고 서있는 나무언덕과 그들을 어루만지며 산 넘어가는 연어 빛 노을.

영랑호 품에는 사람들 안길 자리도 넉넉하다. 자주 나가 걷다 보니 눈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제법 여럿 생겼다. 오늘도 안녕들 하구나, 남녀도 가리지 않고 노소도 개의치 않음은 물론이다. 저 어르신들은 오늘도 정치 이야기고 저 아주머니들은 항상 먹는 얘기다. 다리 아픈 노인들, 마음 쓸쓸한 초로들, 서로 손잡은 여자와 남자, 말이 고픈 중년들. 자전거 타는 학생들, 스케이트보드 선수처럼 멋지게 스쳐가는 젊음들. 그리고 항상 뭔가 소리를 지르곤 하는 어린아이들. 호수가 그 커다란 눈으로 봐주는 멋에 우쭐하면서도 모두 나름 얼마나 영랑호에 겸허하고 성실한지. 나는 하나하나 시선을 주며 눈인사하는 기쁨을 놓치지 않는다. 가끔 사진 찍는 가족들에게 손을 빌려주기도 하고 흉한 쓰레기는 주워 오기도 하는 동네 아짐이 되어 있음이 뿌듯하다.

내 마음의 영랑호 산책은 종종 관계를 맺어왔던 사람들과 동행하는 길이기도 하다. 나에게 남아있는 그 사람들의 모습으로 이루어진 오늘의 내가 걷는 것이기도 하고, 그이들을 한 사람씩 초대해 반추하며 걷는 시간이기도 하다. 미처 못다 한 이야기로 남은 얼굴들. 이젠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도 모르겠는 막연한 이들도 있고, 때로는 돌아가신 부모님, 멀리 있는 형제들, 이제는 어른이 된 어린 날의 자식들이 번갈아 함께 걷기도 한다. 대부분 부족한 내가 다하지 못한 존중과 사랑과 신의와 감사로 회한이 많이 남은 관계들이다.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그이의 속뜻과 아픔이 아하, 이제야 깨달아져 안타깝기 그지없다. 

당신은 참으로 귀해요, 어쩌면 그렇게 예쁜가요, 당신에게서 배웁니다, 나로 하여 아팠던 것 용서해 주세요. 진심으로 고마웠어요, 당신 덕분이었습니다, 너무 미안해서 말도 못 하고 헤어졌었지요, 무심했던 나를 용서해 주세요. 만나서 참 좋았습니다…… 어느 천년에 다시 만나 나의 부족을 만회할 수 있을지. 이런 못다 한 말들을 마음의 동행에게 걸음걸음 고백 하노라면 어느덧 저절로 켜지는 가로등이 어깨를 툭툭 쳐주곤 한다. 

팔천 오백 년 영랑호는 눈 내린 설악산 첩첩한 계곡에서 폭포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돌이 되었다가 나무와 풀이되었다가…… 땅 속에 스며들고 개천을 달려 여기서 잠시 풀어진다. 그리고 먼바다 돌아 동해해류 타고 다시 돌아와 수달 고라니 수리부엉이를 맞아주고 갯버들 노루오줌 범부채 원추리꽃으로 담담한 응시를 하기도 한다. 천 번도 더 걸었으니 이제 나의 이야기도 깊숙한 기슭에 물주름 하나 남겼을까. 영랑호 산책길은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적어가는 오래된 일기장이다. 

작가의 이전글 그리운 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