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st Meets East
음악을 가리지 않고 듣습니다. 지금 제 플레이리스트를 확인해 보니 아이돌 댄스곡, 외국 힙합, 아이유표 발라드, 클래식, 한국 힙합 순으로 정렬되어 있네요. 지금 플레이리스트에 담겨 있진 않지만,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장르 중 하나는 바로 '뮤지컬 음악'입니다. 바로 음악에 기승전결이 확실하기 때문이죠.
겨울왕국 2의 사운드트랙 'Show yourself', 레베카의 메인 넘버 '레베카(Rebecca)'를 듣고 있으면 휘몰아치는 음악에 제 심장도 요동칩니다. 같은 맥락으로 아이유의 '아이와 나의 바다'를 좋아하는데요, '아이와 나의 바다'를 듣다 보면 기승전결, 더 나아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까지 상상되곤 합니다. 노래가 끝나면 언제나 긴 여정을 마무리한 기분이 들기도 하죠.
<East Meets East>는 그런 뮤지컬 음악과 정반대되는 음악으로 가득 채워진 공연이었습니다. 공연 중 송영주 피아니스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기승전결이 아닌 승승승승, 전전전전' 흘러가는 음악이 가득했거든요.
동양적인 색감
공연은 신야 후쿠모리(드럼), 손성제(색소폰), 송영주(피아노), 토루 니시지마(베이스) 4인의 콰르텟으로 구성됩니다. 한국인 연주자 두 명과 일본인 연주자 두 명으로 가득 찬 무대를 보자마자 'East Meets East'라는 제목이 직관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공연을 소개하는 표현에 '동양적'이라는 단어가 있어 '동양적'이라는 말을 곰곰이 곱씹었습니다.
이 공연에서 보이는 'East'는 무엇일까.
이들이 동양인이기에 만들어내는 음악은 어떨까.
독일의 음반 레이블 ECM의 모토는 "The Most Beautiful Sound Next to Silence",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입니다. 신야 후쿠모리, 손성제도 ECM에서 음반을 발매한 바 있어서인지, 이번 공연에서는 어쩐지 침묵을 닮은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공연을 보고 느낀 바로는 음악에 '여백의 미'가 있다는 것. 바로 그 점이 '동양적'이라는 표현에 적합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주자들은 서로의 음악을 공유하며 즉흥적으로 선율의 빈 공간을 채웠는데요, 악기의 분위기를 살리면서 음악에 빈 곳을 의도적으로 남기는 연주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표현이 좀 거창해 보이는데요, 때로는 어쩌면 심심하게 느껴지는 음악을 들으며 각 악기가 만드는 소리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드럼이 숲속에서 흔들리는 나무를 상상하게 만들지는 몰랐거든요.
흘러가는 음악
음악은 그냥 그렇게 흘러갑니다. 어떠한 목적지 없이,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는 물처럼 말이에요.
기승전결 없이 흘러가는 듯한, 그저 흘러가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었습니다. 마치 멍하니 호수의 물결을 바라보고, 숲속에서 흔들리는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미적 만족감을 얻는 것처럼 말이에요.
시작과 끝이 모호한 음악 그 자체를 즐겼습니다. 흘러가는 그대로 그 잔잔한 음악 말입니다.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와 은은한 조화를 그저 귀 기울여 듣는 것으로 만족스럽습니다.
마침표
앵콜곡이었던 아이유의 마침표가 인상 깊었습니다. 손성제 색소포니스트가 작곡한 곡으로 이번 기회로 새롭게 알아가는 곡이었거든요.
공연을 마치고 원곡을 들어보니, 그 느낌이 상당히 달랐습니다. 음원에서는 공연장에서 느껴졌던 여백이 들리지 않았거든요. 멜로디의 유사성은 있지만 아예 다른 곡 같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가사가 있고 없고의 차이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곡을 풀어내는 방법의 차이가 이와 같은 변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재즈의 즉흥성이 담담한 서정을 이야기하는 아이유의 곡과 어우러져 묘한 울림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울림을 더 느끼고 싶어 이번 공연 관람에 마침표를 찍는 게 아쉬웠네요.
기승전결이 없기에 아름답습니다. 승승승승, 전전전전. 음악에서 느껴지는 여백과 흐르는 듯한 연주를 듣고 있으면 자연 한복판에 놓인 기분이거든요. 음악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말의 의미가 와닿는 공연이었습니다. 그냥 큰 변화 없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자연 말입니다. 이번 기회로 재즈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