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찾아다닙니다. 뭐든 보고 경험하면 배울 게 있을 것이라는 에디터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취미입니다. 어쩌면 안목 넓히기 훈련일 수도 있겠네요.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니면서 문득 '왜 전시여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읽은 <미술관을 좋아하게 될 당신에게>는 질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게끔 도움을 줍니다.
책은 마치 미술관과 같습니다. 입구부터 제1전시실, 제2전시실, 제3전시실, 제4전시실, 그리고 출구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책을 모두 활보하고 나면 마치 전시장 구경을 마친 듯, 전시라는 큰 주제가 기분 좋게 머릿속에 맴돕니다.
제게 가장 기억나는 두 작품, 제2전시실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의 <전시 공간 디자이너>, 제3전시실 '익숙한 시선과 새로운 시선'의 <휴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전시 공간 디자이너> - 제2전시실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 중
예술가와 감상자만 있다면 전시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전시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이들이 존재하는구나 새삼 놀랄 수 있었습니다.
예술가, 큐레이터와 갤러리스트, 에듀케이터와 도슨트, 전시 공간 디자이너와 보존과학자가 소개되는데요, 특히 '전시 공간 디자이너'가 소개된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책을 읽기 전, 예술가와 감상자가 직접 소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자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까요. 책을 읽고 나서는 전시 공간 디자이너가 예술가와 감상자를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맡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 공간 디자이너는 '작품과 공간과의 적절한 호흡으로 작품의 아우라를 느끼고 미적 경험을 하게(p.134)' 만듭니다. '전시 디자인은 아름다움과 함께 예술 작품에 대한 해석이 동반되는 일(p.136)'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공간 디자이너는 예술 작품을 이해한 후, 작품을 가장 잘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공간을 구성해야 합니다.
작품을 걸어 놓는 벽의 색, 작품 배치 순서, 작품을 바라보는 감상자들의 시선 등 감상자가 작품을 기억하는 과정에 놓인 모든 요소들을 신경 쓰겠죠. 우리가 작품으로부터 느끼는 원초적인 감각 덩어리는 예술가가 만들겠지만, 그 뾰족하고 거대한 덩어리를 전시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으로 다듬는 것은 공간 디자이너의 역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추가적으로 재미있던 부분은 '화이트 큐브', 다시 말해 벽과 바닥이 새하얀 전시 공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화이트 큐브는 '발명품'이라고 하는데요, 작품을 액자 없이 그 자체를 감상하게 만들고, 동일한 전시 조건을 만들 수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새삼스레 아주 혁신적인 발명품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술이 일상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효과가 있는 건 맞지만, 그것이 동시대 미술 작품의 영역으로 들어오려면 지속해서 보여주는 메시지가 있어야 합니다. 아름답고 새로운 것은 분명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미술사와 함께 공공미술의 변화 과정을 떠올려보면 아름다움과 참신함만으로는 예술의 영역에 머무르기 힘듦을 알 수 있습니다. 작품만의 시선, 즉 철학이 있어야 하죠.
p. 87-88
제1전시실 내용을 인용해 보았습니다. 전시에는 여러 사람들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예술가의 철학, 그리고 예술가의 철학을 보여주고 전달하기 위한 모든 이들의 철학 말이죠. 한 공간을 누비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을 배워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시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휴식> - 제3전시실 '익숙한 시선과 새로운 시선' 중
전시를 즐긴다는 말에는 전시관 내부를 둘러 보고, 카페에 앉아 감상을 나누는 전시장 외부의 경험도 포함될 수 있겠습니다. 평소 전시를 관람한 이후 배고프다며 식사에만 집중하곤 했는데요, 앞으로는 책에 수록된 방법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흥적인 반응 정리하기
- 감정을 단어로 정리하며 느낌에 대한 나만의 해석을 정리한다.
심층적인 반응 정리하기
- 작가의 과거를 파헤쳐 본다. - 작품과 함께 보면 좋을 다른 장르의 예술을 공유한다.
특히나 친구들과 함께 전시를 관람한 후, 작품에 풍미를 더할 다른 장르의 예술을 공유한다는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 작품과 어울리는 음악, 작품을 기억나게 할 향기, 분위기가 연상되는 영화 등을 이야기하며 작품에 대한 경험을 훨씬 풍요롭게 만들 수 있겠죠.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의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를 관람했는데요. 관람 이후, 동반했던 친구와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합스부르크의 마르가리타 왕녀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곡이기에, 작곡가의 시선을 짐작하며 곡을 들었습니다. 알던 음악에 새로운 기억이 더해지는 게 흥미롭더군요.
전시에서의 경험은 다각도의 시야를 만들어 주고, 가지고 있던 기억을 새로운 기억과 연결시켜 사고의 범위를 넓히기도 합니다. 넓어진 시야와 깊어진 사고는 다시 나를 알아가고,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도록 만들어 줍니다.
전시장을 나가며
앞으로도 꾸준히 전시회를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보다 명확해진 방문 이유와 함께 말입니다.
전시는 무딘 감각을 깨워주는 데 도움을 줍니다. 예술가와 전시를 만드는 모든 이들의 시선과 의도가 반영되어 있기에 그들의 철학을 배워올 수 있겠죠. 전시는 또한 기억과 사고를 깊어지게 만들어 줍니다. 작품을 이해할 때까지 작품 앞에 머무르고, 작품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고, 전시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리는 모든 경험들은 나 스스로를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보다 넓어지도록 만들 것입니다.
조만간 향을 경험할 수 있는 전시를 운영할 예정입니다. 책에서 얻은 내용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깊이감을 느낄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