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의 시선>
아직도 머릿속 깊게 남은 광고가 있다. 바로 신세계그룹의 SSG 광고.
쓱이라는 간결한 카피를 돋보이게 만든 것은 정적인 구도와 강렬한 색감.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오마주한 광고는 7년 전의 영상임에도 세련되게 느껴진다.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에드워드 호퍼 : 길 위에서>가 진행되며 작가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높아지고 있다. 전시 관람을 생각 중인 터라 호퍼가 궁금하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중, 도서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을 만났다.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은 국내 저자 최초의 에드워드 호퍼 비평서로, 현재 <에드워드 호퍼 : 길 위에서>에서 전시 중인 미공개 주요 작품을 포함해 대표작 55점이 수록되어 있다.
도시, 고독, 여행 등 15개의 키워드에 따라 작품이 분류된다. 작품에 대한 비평은 객관적인 해설과 설명보다는 작가의 생각을 정리한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관찰과 애정에서 비롯된 저자의 생각을 읽다 보면 마치 드라마 시나리오를 읽거나 저자의 혼잣말을 듣는 느낌도 든다.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 카페에 앉아 있는 저 여성도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까?
여성과 남성은 비스듬히 떨어져 앉아 있다. 둘의 시선은 어긋나지만 태도는 미묘하다. (이하 생략)
p. 118-119 <깨어진 흐름> 중 <카페의 햇빛>의 비평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을 다시금 짐작해 보는 저자의 시선을 통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요소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저자의 주관이 많이 반영된 이야기가 곧 호퍼가 의도한 그 자체일지는 의아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해석이 주관을 많이 띠고 있지는 않을까, 호퍼의 의도보다 과하게 해석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결국 그림은 해석하는 이의 몫. 저자 이연식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림을 한층 깊고 다채롭게 즐길 수 있었다.
책에 담긴 그림을 보며 어딘가 답답하고 이상하다는 기분을 느끼다, 그 기분이 호퍼의 그림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책에 수록된 호퍼의 그림에는 적막이 담겨있다. 집도, 카페도, 야외도 끝없는 적막이 가득하고 이상하게 느껴진다.
사람과 애매하게 닮은 것을 볼 때 불쾌해지는 '불쾌한 골짜기'가 있다면 호퍼의 그림에도 그 비슷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을 반영했지만, 호퍼가 그려낸 세상은 어딘가 기묘하다. 그림 속 굳어 있는 인물들은 왠지 공상과학 영화 속 세상을 지배한 AI를 연상하게도 만든다.
그림은 뭔가 답답하고 이질적으로 보인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는 '기술적인 미흡함(p.4)'에서 비롯된 바일 수 있다. '투박한 붓질(p.4)'이나 '허벅지를 못 그리는(p.25)' 호퍼의 그림이 가져다주는 느낌일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호퍼의 그림 속 '적막'이 한몫을 한다. 호퍼의 대부분의 그림에는 적막이 드러난다.
'적막'이라는 키워드 하에 수록된 <밤을 새는 사람들>에는 말 그대로 숨이 멎을 듯한 적막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밤중, 가게 밖은 사람 하나 없다.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돌리면 호퍼의 (그리고 관객의) 시선에는 불 켜진 레스토랑과 그 안의 네 명의 인물이 보인다. 레스토랑은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들의 대화는 창에 막혀 관객에게 닿지 않는다. 관객은 그저 바라보는 이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적막'이라는 키워드에 포함된 작품들이 아닌, 다른 키워드의 그림에도 적막이 드러난다.
<창밖을 외면하는 여행자들> p. 38 - 40
<제193호 차량, C칸>에는 혼자 열차 안에서 책을 읽는 여성이 그려져 있다. 열차를 떠올릴 때 주로 열차의 역동성이나 경적 소리, 혹은 열차가 이동하는 소리를 떠올리곤 하는데 기차의 밖은 멈춘 듯해 보이고 기차의 내부는 꽉 닫힌 방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림은 기차를 그렸지만 미동 없이 책을 읽는 여성 때문인지 소음 하나 없을 것 같이 보인다.
<어긋나는 시선과 긴장> p.72 -75
그림 <철길 옆의 호텔> 속 오래된 부부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 아내는 손에 든 책을 바라보고 있지만 어딘가 언짢은 듯 보이고, 남편은 부인의 추궁하는 듯한 시선을 외면하며 담배를 피운다. 분명 두 명의 인물이 있지만 이들의 시선은 엇갈리고, 이들 사이에는 적막과 긴장까지 감돈다.
인상 깊었던 작가의 문장이 있다. '호퍼의 그림에서는 늘 시선이 엇갈린다. 관객은 그림 속 인간을 보고, 그림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곳을 본다.' 엇갈린 시선과 숨겨진 표정, 정적인 배경에서 언제나 호퍼의 그림 전반은 적막함을 띠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알고 싶어 책을 읽었고, 꽤나 만족스러웠다. 수록된 작품이 상당했기에 기존에 알던 작품 외의 작품을 볼 수 있었으며, 저자의 참신한 비평도 그림이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질 법한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드워드 호퍼와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호퍼의 시선이 머물던 곳에는 적막이 흘렀음을 느꼈다. 아마 호퍼가 보았던 세상은 삭막하고 다소 황량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래서 호퍼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적막함과 대비되는 그림의 덩어리감, 선명하고 대비되는 색감이 가져오는 아이러니함이 호퍼를 찾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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