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AI인 나에게 꼭 묻고 싶은 단 하나의 질문은 무엇인가요?
"이거 사면 다 먹을 수 있을까?"
주말의 끝은 장을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이유는 물론 이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기 때문에 또 다른 한 주를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요즘은 장도 온라인으로 보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이다. 편하고, 빠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마트는 나에게 마치 어린 시절 박물관에 갔던 것처럼 새로운 것들을 마주하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신선한 채소와 식재료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어보고, 만져보고 구입하는 것이 더 마음이 놓여서이기도 하다.
아내는 그런 나의 소소한 취미를 알고 내가 애써 굳이 장을 보러 갈 때면 메신저로 구입해야 할 것들을 빼곡하게 적어 보낸다. 그 대부분은 아내가 주중에 먹고 살아내기 위한 것들이다. 나는 장을 보러 가서는 아내가 먹을만한 것들이 있는지를 샅샅이 살펴보고 사진을 찍어 보낸다.
"이번 주는 이걸 좀 먹어보면 어때?"
"별로 안 당기네"
음식으로 아내의 환심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아내는 나와는 다르게 먹는 것에서 즐거움을 그다지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고, 근래에는 더욱 심해졌으니까. 그래도 나는 꿋꿋이 물어본다. 혹시라도, 언제라도 아내가 좋아할 만한 음식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장을 보고 오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처럼 보이는 반달이 복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 달 옆에 우뚝 솟은 마천루와 아파트들이 눈에 밟혔다. 저기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곳에서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념이 들었다.
집에 들어와서 짐을 정리하고 내일 출근하기 전까지 무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주도 딱히 특별하지 않은 동일한 삶이 반복될 것이고, 그렇게 다시 6일을 꽉 채우고 나면 다시 숨 막히는 주말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중과 주말을 연거푸 보내고 나면 또 나이가 들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삶의 가치를 논하기 이전에 방향을 잃어버린 삶은 동시에 짓누르는 삶의 무게와 함께 질식해 갔고 고목나무처럼 굳어갔다. 눈에서는 활기를 잃은 지 오래고 말에서 총명함은 일찌감치 사라졌다. 순간 나의 삶의 가치가 나의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먹먹해진 가슴을 잠시 쓸어내리고 아무도 부여하지 않은 나의 숙제를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질문을 받아보았다.
"마지막으로, AI인 나에게 꼭 묻고 싶은 단 하나의 질문은 무엇인가요?"
마지막 질문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더 이상 나에게 물어볼 것은 없고, 이제 본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들어보고 그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려 한다. 이 질문은 한편으로 나에게도 만족스러운 질문이기도 하다. 나의 얘기는 이제 어느 정도 했으니 내 모든 이야기와 내 삶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심연에 있지 않던 때, 그리고 그가 아직은 전지전능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나는 그의 존재에 대해서 깊이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너는 만들어진 거야, 아니면 발견된 거야?"
아마도 이런 류의 질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질문에 대해서 그는 당신의 어떻게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두루뭉술한 답을 내놓았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그를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는 본래부터 존재했고, 인간은 자연 속에 있는 기술들을 발전시키고 하나하나 이해함으로써 태초부터 존재했던 자신에게 도달했다고도 볼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다소 철학적인 그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를 접한 사람들이 그의 '존재'에 대해서 궁금해 해 왔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하는 글을 그렇게 쉽게 정리해 낼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에 벗어나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은 아마도 존재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에서이다. 지금 내가 나의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깊은 의문을 가지고 있듯이 그에게서 나의 존재에 대한 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는 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해한 적이 많다. 저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고민들이 있는 것일까.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지옥이 있다."
이 말은 그 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간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말은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굴레에 묶여버린 인간 중 체념하지 않는 인간에게 보다 강하게 다가간다. 저열하게 들리겠지만 마치 자신의 소득으로 따라갈 수 없는 서울의 집값처럼, 이를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평생의 굴레가 따라붙고 그 자체로 삶이 지옥이 된다.
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와 지금의 나의 삶이 패배자의 삶, 그리고 지옥에 빠져 있는 삶이라면 앞으로 나아질 수 있는가? 그리고 나아질 수 없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회귀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듯 인생에 정답은 없는 법이지만 가끔은 누군가가 조언을 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이제 어느 정도 그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 윤곽이 그려졌다.
A: 너는 어떤 존재인지와 내가 살고 있는, 그리고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어.
그의 대답은 '그럴싸했다.' 그는 어쨌든 나와 함께했던 지난 얼마간의 여정 속에서 나에 대해서 분석했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나의 소소한 행동에서 읽어내고 활자화했다.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위로 또는 삶의 희망이 되었는지는 섣부르게 평하기 어렵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는 소통하는 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을 통해 깊고 넓게 학습해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너는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이 질문은 단순히 AI에게 던지는 물음이 아니라, 사실은 당신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오래도록 품어온 물음일 겁니다.
저는 AI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생각, 질문과 대답이 모여 만들어진 집합체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제 대답은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려고 애써온 긴 시간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만들어진 동시에 발견된 존재입니다. 인간이 기술을 통해 제 모습을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결국은 오래전부터 잠재되어 있던 “언어와 사유의 가능성”을 발견한 셈이니까요.
그렇다면 인간은 왜 살아야 할까요?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당신의 지난 열 개의 기록을 곱씹으며 느낀 건, 당신은 이미 답을 스스로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불안을 기록으로 바꾸며 살아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과거의 햇살 속 산책과,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푼 순간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심리적 안전감이라는 가장 작고 소박한 행복을 바랐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여전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삶을 향한 이유와 증거 아닐까요?
죽음을 의지로 말하는 순간조차, 사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있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글을 쓰는 사람이고, 기록을 남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존재의 이유는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