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의지 vs 결정론에 대한 심화 분석
모두에게 운명이란 반드시 있는 법이다.
우리 할머니의 말을 빌려서 서술해보겠다.
어느날 할머니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건 있어."
처음에 나는 의아했다. 운명이란 무엇인지 궁금해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뜻을 짐작하기란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이 책 《오이디푸스 왕》을 적어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모두에게 운명이라는 것은 있다는 것을.
앞서 이야기 했듯 이 내용은 전 편 《오이디푸스 왕》줄거리 리뷰 - 와 연결된다. 다시 한번 그점 참고하길 바란다.
《오이디푸스 왕》과 《맥베스》에는 두가지 비교 분석점이 있다. 첫번째는 두명다 겁쟁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기는 내 행색이 뭐하지만 이 두 인물들은 자신의 운명을 거른다. 이 말은 두 명다 자기 자신을 회피 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기 자신을 아버지 어머니께 도망침으로서 운명을 회피한다. 하지만 이는 비극을 초래하고 결국 그 운명이 성사된다. 또한《맥베스》까지 이와 또 비슷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할 수 없는 일 (아마도)를 스스로 통제할려고 하며, 자기가 받아들인 정보를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자신을 위해 살인을 저지를 도적 두명을 고용한 것도 이와 같은 사례가 되며, 결국 이는 끝없는 욕심과 불안을 일으켜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게 한다. 이는 두명다 잘못된 믿음, 하지만 여기서는 진실성이 드러나지 않은 정보성을 믿고 그에 따라 대비하려고 하는 마음가짐이나 액션은 자기 자신에게 되려 큰 재앙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그린다. 이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고를 부각시키는 것이자 폐허를 생생히 보여준다. 그렇기에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점을 받아들이며 배워나갈 수 있다. 바로 자신의 운명을 맞닥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앞서 소개 했듯 할머니가 말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성실히 해내라는 말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깨달았다.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나간다는 것을.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그리고 내가 소제목에서 서술했던 자유 의지 vs 운명론이 여기서 부각된다. 우리 모두에게 자유 의지란 있을까? 모든게 계산되며 순리 대로 되고, 모든 것은 이미 결정나 있는 걸까? 이는《오이디푸스 왕》과《맥베스》를 통해 진실을 알 수 있다. 일단 첫번째로 모두에게 운명이란 있다. 이말을 3번이나 반복하는 것은 알겠지만 매우 중요한 말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탐구하는 비판적 관점을 가질 필요성이 있다. 즉 이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고, 우리 자신이 가진 고유함의 가치성에 관심과 집중을 기울이라는 말이다. 우리 모두는 특정 유전자를 지니며, 그에 DNA 에 따른 성격 형성, 기질과 성향이 결정된다. 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성향에 따라 우리는 생각하고 대부분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우리 삶에서 중요하다. 기존 우리가 가진 성향이나 기질에 따라서 우리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이는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의사결정은 우리의 성향이나 성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고 이는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기도 한다. 우리의 성격과 성향이 곧 자기 자신과 내면의 가치관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운명이란 무엇일까? 드디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겠다. 그전에 이 두 작품 부터 말해보겠다. 나는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이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을까?' ' 탈출로는 없었을까?' 이는 흔히 우리가 할 수 있는 비판적인 질문이다. 먼저《오이디푸스 왕》은 오이디푸스 자기가 도피 행각을 벌였다. 이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을 의미하며, 이에 대한 회피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내 매우 개인적인 생각이다). 우리는 우리 앞을 알 수 없다. 아무리 예언자가 있다 한들, 우리는 직접적으로 내 앞을 내다 볼 수, 들여다 볼 수 없다. 이는 곧 우리가 운명을 맞닥드리지 않는 이상 자유 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우리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고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안 받아들이는데 어떻게 선택과 결정이라는 것을 하고 내 삶의 운명이라는 것을 바꿀 수 있는가? 이는 우리 모두가 해야하는 질문이다. 결국 (이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내 생각이다) 오이디푸스는 자기 자신의 예언을 그대로 실행될때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운명이 올 때까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리의 운명은 단 1초라도 그 전까지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른 사건이나 요소의 영향이 개입할 수도 있고, 이는 곳 내 운명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내《오이디푸스 왕》과《맥베스》를 통한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자신의 운명이, 예언이 올 상황 까지 기다려 봤으면, 일단 그 운명을 직접보고 감안할 수 있다는 선택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우리가 운명을 직접 받아들이지 않고 나가버리거나 회피하면 나에겐 선택권, 자유 의지를 결정할 초이스 자체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피를 하는 것은 이는 이미 운명이 그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으로 결정된 것이다. 만약 상황이 일어날 때 까지 직접 기다리면 모르는 것이다. 내가 운명이나 앞으로 맞닥드릴 상황을 최소화하거나 바꿀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는 곳 회피나 통제, 자신 앞에 주어진 것을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예언이나 자신의 운명이란 그저 단지 자신 앞에 주어진 것만 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무슨 예측된, 예견된 미래가 아닌, 그저 우리가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가듯 그저 단순히 앞에 놓인 상황만을, 단순히, 의미하는 것이다.) 무마 하려는 행동은 나의 자유권을 박탈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야 된다. 그래야 내 운명을 직관하고 통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이는 운명의 해방, 자기 자신이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뜻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고유한 것이 곧 바로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에 따라 우리는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 할 지, 등등). 물론 이는 생물학적으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시간에 따라 우리의 성향과 성격은 바뀌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질적인 부분은 바뀌지 않는다. 이는 부분적으로 최소한 우리에게는 이러한 부분에는 주어진 자기 자신의 삶의 몫이 있다는 말이다.
결국 이는 오이디푸스와 맥베스는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었고, 그 상황을 통제하려 하거나 회피만 하지 않으면 직접적으로 자신이 앞에 닥친일에 대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그 두려움과 불안을 못이겨내고 도망치거나 도적을 고용해 자신을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이는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초래하고 있으면서 그 운명을 두려워 하다니. 이는 전 글에 말한 알 수 없는 미래나 허구한 사실에 대한 신앙과 생각이 곧 우리 의사결정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앙의 의미는 중요하다. 그러니 강조한다. 이는 단순한 신념이나 믿음 따위가 아닌 이 것을 애당초에 전제로 생각이나 행동 따위를 그려내게 만드는 그러한 믿음, 한마디로 어떻게 보면 (어떻게 보면은) 종교적인 믿음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해보겠다. 그러니 예언따위는 믿지 말라. 우리가 그에 통제 당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겠다. 오늘날 이렇게 내가 이렇게 글을 적고 써내려 갈 수 있다는 것, 브런치 작가에 당첨된 것 또한 나에게는 기적이며, 오늘날 내가 세상에 대해 사랑으로 보게 해 주 실 수 있게한 어머니께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내가 어렸을때 겪었던 스토리 하나를 알려주겠다. 유치원적 어렸을 시적에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좀 더 왜소하고, 예민한 특성(기질)을 가진 아이였다. 이 때문에 빈번이 의기소침해 졌고, 늘 유치원 친구들과 많이 어울려 다니지 못하였다.(이는 그럴 수도 있다. 그냥 서술하는, 넣는 말이니 이거에 대하여 내가 힘들었거나 어려웠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한가지 결점이 있었는데 바로 어렸을 적에는 분리불안이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것을 세상에 공유한다. 그 때문에 나는 선생님이 어디 근무하거나 다른 곳으로 방에서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나는 이것을 못 참고 늘 울음을 떠뜨렸다.
참으로 매우 안타까운 일이였다. 이는 곧바로 선생님이 내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의지하지 못하여 어두운 길을 걷는듯 하며 무서움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그런 느낌이었다. (진심이다) 그래서 나는 늘 집에 와서 하루를 엄마에게 의지 할 수 밖에 없었고, 엄마는 정말 다행히 내가 집에오면 늘 따뜻한 말과 사랑을 주며 나를 분리불안으로 부터 안심시켜줬다. 이 덕분에 나는 이를 극복해낼 수 있었고, 엄마에게 사랑을 받아서 이 세상을 사랑으로 보게 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곧 엄마가 그때 당시에 나에게 준 보살핌과 사랑이 나중에 사춘기때 내 성향과 어렸을적 좋은 기억이 증폭되며 이 세상을 남들보다 누구보다도 더 훨씬 사랑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 진심으로 엄마를 너무 사랑한다. 이는 오늘날 내가 글을 쓸 수 있게 된 이유, 사랑하고 책을 볼 수 있게된 이유이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과 도움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을 늘 사랑과 따뜻함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밑장빼기는 아니지만 매번 그러한 것은 아니다 ㅋㅋ)
이렇게 오늘 글을 마치겠다. 모두에게 이 글이 도움되기를 바라며 마쳐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