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윈 단상
이 나라는 할로윈에 참 진심이다. 마트에 가면 온통 할로윈 장식에 호박 파운드 케이크, 호박 머핀, 호박 쿠키를 팔고 심지어 펌킨 스파이시 커피 크리머에 펌킨 에일 맥주까지 나온다. 내 머리 10배만한 크기의 호박들이 입구 앞에 산처럼 쌓여있기도 하다. 아파트는 그래도 좀 덜하지만 싱글하우스들은 이미 9월 말부터 할로윈 장식에 들어간다. 길을 가다보면 누가 더 잘 꾸미나 경쟁하듯 으리으리하게 장식해놓은 모습들을 보며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차를 멈추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할로윈 일주일 전부터는 동네마다 각종 행사도 열린다. 메인 거리를 통째로 비우고 퍼레이드며 이벤트들이 열리고 아이들은 코스튬을 입고 가게를 돌아다니며 trick or treat을 한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할로윈이 있는 주 월요일부터 오늘은 pajama day, 내일은 picture day, 모레는 hat day라며 분위기를 돋우고 할로윈 당일은 종일 행사가 열린다. 코스튬을 입고 등교할 뿐만 아니라 운동장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교실에서는 파티와 게임을 즐기는데, 반마다 서로 다른 게임이 준비돼있어서 아이들은 같은 학년 반을 돌아다니며 게임을 하고 사탕이나 장난감을 받는다.
한국에서는 이태원 참사 이후에는 지인들과 조촐하게 하던 할로윈 파티도 중단했던 터라 이곳에 올 때도 할로윈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9월부터 이미 나라 전체가 할로윈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뜨는 모습을 보며 아이 코스튬이라도 준비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퍼뜩 떠오른 것이 바로 케데헌-진우. 진우로 준비하면 한국적이기도 하면서 미국 아이들도 거의 모르는 아이가 없을 정도라 친숙할 것 같았다.
그렇다. 미국 초중고 학생이라면 대부분 알 거라고 사뭇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K-POP Demon Hunters. 한국에 있을 땐 인기가 이 정도인 줄은 전혀 몰랐다. 유튜브 조회수가 얼마라는 둥, 무슨 무슨 유명 차트에 올랐다는 둥 하는 뉴스는 잇단 정치경제적 사태로 지친 우리의 심신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기 위한 호들갑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너무 놀란 게, 아이 학교 행사에 갔는데 배경음악으로 Golden 노래가 나오자 아이들이 스피커로 달려가 떼창을 하는 거다. 아니, 이 노래를 이렇게나 다들 안다고? 그뿐이 아니다. 동네에서 소소하게 K-Culture 페스티벌이 열렸는데 거기서도 Golden과 Soda Pop 같은 노래가 나오자 미국 아이들이 막 무대 앞으로 나와 나도 모르는 춤까지 추면서 떼창을 하는 거다. 그저 한국을 아는, 한국에 관심 있는 소수의 지한파, 친한파 정도만 케데헌을 봤겠거니 했던 건 완전 오산이었다. 주변에서 노래가 하도 좋다길래 미국 오기 전 노래 위주로 한 번 대충 훑어보고 온 게 반성이 될 지경이었다. 그날 밤 집에서 아이와 함께 다시 한 번 케데헌을 정주행했다.
엊그제는 지인 가족과 함께 놀이공원에 갔는데, 놀이공원도 10월부터는 온통 할로윈 일색이라 아이들은 코스튬을 입혀서 갔다. 지인의 아들이 진우 스타일로 입고 갔는데, 여러 미국인들이 지나가면서 "오, 진우!" 하면서 의상을 알아봤다. 신기했다. 얼마 전 케데헌 3인방이 '지미 팰런쇼'에 나온 것도 정말 놀라웠는데, 하긴 이렇게 대중적 인지도가 높을 정도면 '지미 팰런쇼' 출연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같이 케데헌을 정주행하고도 별 감흥이 없던 나의 아이는 '진우' 코스튬을 대차게 거부했다. 이곳에서 갓과 검정 도포를 구할 수가 없어서 갓은 검정 부직포로 직접 만들고 도포는 검정색 마녀 가운으로 리폼해보려 했던 나의 수고도 덕분에 아낄 수 있었다. 다만 나는 그리 쿨(?)하지 못해서 미국 아이들도 다 따라부르는 Golden을 한국인인 내가 모르면 되겠나 하는 생각에 틈나는대로 Golden이나 Soda pop을 들으며 가사를 외우는 중이다. 한편으론 죄다 영어인 이 노래들을 과연 K-POP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요즘은 부르는 사람이 한국인이면 K-POP인 모양이니 토를 달지 않으려 한다.
20여년 전에 처음 미국에 왔을 땐 Korea에서 왔다고 하면 대체 어느 대륙에 붙어있는 나라인지 전혀 감을 못 잡는 사람도 있었고, Which Korea?라고 되물어서 정말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Korea에서 왔다고 하면 "안녕하세요?"라든지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미국인들도 참 많다. 얼마 전에는 어느 갤러리에 갔는데 화가가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South Korea라고 하니 자기 딸이 최근에 서울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너무 좋다고 하더라며 반가워하기도 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국력이나 경제 순위가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데 미천한 나조차도 이렇게 인지도 변화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면 이건 오롯이 문화의 힘이 아닐까 싶다. K팝, K뷰티, K푸드...그리고 이를 아우르는 K컬쳐. 부디 반짝 인기로 그치지 않고 시대에 맞게 진화하며 21세기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