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본 필라델피아

노숙인과 프랭클린

by 황혜경

"엄마, 저 11월 한 달 동안은 게임 안 할래요."

2박 3일 필라델피아 여행을 마치고 떠나기 직전 점심을 먹다가 아이가 불쑥 '게임 중단' 선언을 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지만 짐짓 못 미더운 척을 좀 가미해서 "왜 그러려고 하는데?"하고 되물었다. "제가 너무 중독인 것 같아서 얼마나 중독인지 확인해 보려고요. 만약에 11월 한 달 동안 잘 견디면 12월에는 주말에만 30분씩 하고, 중독이 아닌 것 같으면 1월부터는 주말에만 1시간씩 할게요."


주말에만 1시간씩 하는 건 그간 내가 제시한 안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한 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좀처럼 스스로 중단하지 못했고, 내가 여러 차례 시간이 다 됐음을 알려도 '조금만요', '잠시만요', '이것만 깨고요'를 반복하면서 2시간도, 내버려 두면 3시간도 마다하지 않고 게임을 해왔다. 어떤 때는 내 일이 바빠서, 어떤 때는 나도 좀 쉬고 싶어서, 어떤 때는 '어디 한 번 질리도록 해봐라. 질리면 멈추겠지' 싶은 마음에 실컷 하도록 둔 적도 있지만 대개는 참다못한 나의 '버럭' 그리고 일장 잔소리로 귀결되곤 했다.


나도 어린 시절 슈퍼마리오 같은 게임을 즐겨했고, 그 나이대에 얼마나 그게 재밌는지, 스스로 조절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아예 못하게 하거나 턱없이 짧은 시간만 허용할 생각은 없다. 사실 약속한 시간만 잘 지킨다면 주말 2시간씩도 허용할 용의도 있고, 친구들과 노는 날이라든지 특별한 날에는 그 이상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아이의 게임 집착은 약간 도를 넘은 상황이었다. 마치 눈 뜨고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게임 생각만 하는 듯 보였다. 당연히 평일에도 '오늘 무엇 무엇을 하면 게임 좀 해도 돼요?'라고 묻는 횟수도 많아졌다. 뭘 하는 대신 뭘 하게 해 준다는 조건 걸기는 되도록 안 하려고 엄청 노력하는 편이다 보니 저런 질문이 훅 들어오면 게임이 그간의 노력마저 다 허사로 만드는 것 같아서 더 화가 났다.


사실 닌텐도도 사주고 플레이스테이션도 사주고 핸드폰도 손에 쥐어주면서 10살 아이에게 스스로 절제해서 사용하라고 하는 건 과한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냥 다 싹 없애버릴까? 하는 유혹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미 게임이 뭔지 아는 아이인데, 그리고 앞으로도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접할 텐데 아예 못하게 하는 건 오히려 집착을 키우거나 부모 몰래 하는 악순환을 가져올 것 같다. 오래 걸리고 힘들더라도 스스로 규칙을 세우고 지키는 습관을 길러주는 게 상책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런 습관을 키워줄 수 있을지,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더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와 갈등 없이 중단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 고민이 많던 찰나에! 아이가 스스로 자신이 중독인지 아닌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하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루, 아니 반나절만에도 말을 바꿀 수가 있어서 얼른 영상으로 찍어두고 만약에 의지가 약해질 것 같으면 이 날의 다짐을 다시 한번 같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하기도 했다. 밥 먹다 혼자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불쑥 꺼낸 얘기.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길래 아이가 스스로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걸까?


필라델피아 거리의 노숙자를 보며 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필라델피아는 그간 아이가 보아온 버지니아와 DC의 거리와는 너무나 달랐다. 보다 다양한 군상의 행인들과 노점들, 웅장한 스카이라인과 도시스러운 경적소리, 한때 미국의 수도가 될 뻔했던 곳답게 크고 화려해 보였다. 반면 도시의 어두운 이면도 함께 눈에 띄었다. 한 블록에 한 명씩은 볼 수 있었던 노숙인들. DC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대대적으로 벌였던 '노숙인 강제 퇴거 명령'때문인지 거리에서 노숙인은 거의 볼 수 없었는데 필라델피아는 달랐다. 노숙인뿐 아니라 지하철역 부근이나 사거리 등에는 할 일 없이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과연 담배일까 싶은)를 피우며 낄낄거리는 무리들도 많이 보였다. DC는 거리마다 지나칠 정도로 경찰과 군인들이 많아서 위압감마저 느껴졌는데 여기는 경찰이나 경찰차는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여서 차라리 위압감이 드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이는 말 그대로 길바닥에서 자고 있는 노숙인을 이곳에서 처음 보았다. 필라델피아 도착 이틀째 아침 조금 일찍 숙소에서 나왔더니 길에 얇은 이불 하나 덮고 자고 있는 노숙인이 여럿 보였다. 머리맡에는 먹다 남은 건지, 아니면 자고 일어나서 먹으려고 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과일 조각도 있었다. 나는 사실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아이는 다소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걸 미처 모르고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 "너 지금처럼 이렇게 계속 매일 게임만 하고 그러면 대학도 못 가고 직장도 못 얻고 저렇게 노숙자 된다"였는데, 아이는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아이가 인상 깊게 본 부분이 또 하나 있다. 거리 곳곳에 있던 벤자민 프랭클린의 동상들이다. 심지어 필라델피아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과학관 이름도 '프랭클린 인스티튜트'였는데 아이는 왜 과학관 이름이 '프랭클린'인지 궁금해했다. 사실 나도 벤자민 프랭클린 이름만 알지 뭘 했는지 잘 몰라서 AI가 정리해 준 그의 간단한 약력과 업적을 읽어주었는데,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해 비단 과학뿐 아니라 정치, 외교,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것을 듣더니 아이는 조금 놀란 듯했다. 그래서 그가 100달러 지폐에도 그려져 있는 것이냐면서 자신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단다.


필라델피아뿐 아니라 미국에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과학관 등에는 아이들을 위한 무료 체험이나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이번 여행에서도 하루는 미술관에서 종일, 하루는 과학관에서 종일 시간을 보냈지만 다 둘러보지 못했을 정도로 두 곳의 규모가 컸다. 한국이었으면 좁은 공간에 사람들에 치여서 체험도 대충 하고 다음으로 빨리빨리 넘어가야 했을 텐데 이곳에서는 아이가 원하면 몇 번이고 다시 해볼 수 있는 점이 너무 좋았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눈치 안 보고 실컷 즐기고, 또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대도 다시 줄을 서면 금방 되니 아이는 너무나 신나 했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체험들보다도 이번 여행에서 아이 머릿속에 각인된 건 선명하게 대비됐던 저 두 가지 모습이었던 것 같다. 최근 들어 온통 아이를 지배하고 있던 게임인데 그걸 한 달 동안이나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언한 걸 보면 말이다.


물론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게임 얘기를 나눴고, 하교하자마자 날 보며 약속을 지키기가 너무 힘들다며 푸념했다. 하지만 일주일가량이 지난 지금까지 어쨌든지 간에 약속을 지키고 게임은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게임 관련한 걸 언급하는 횟수도 확 줄었다.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는 산타 할아버지께 '로벅스'를 받고 싶다며 수년 동안 안 하던 카드도 써서 트리 위에 걸어놓긴 했지만 ㅎ 11월 남은 기간 동안에는 세상에 게임보다도 즐거운 게 얼마나 많은지, 게임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아이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좀 더 만들어 봐야겠다. 그래도 12월부터는 다시 게임을 할 테고 하다 보면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한 번 중단해 본 경험, 자신과의 약속을 깨지 않고 지켜본 경험 그리고 그 빈 시간을 채워준 재밌는 경험들이 쌓인다면 언젠가는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아이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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