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수비오 화산이 남기고 간 자국

70일간의 유럽 여행 (6) - 이탈리아 나폴리

by hye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로 어둑한 골목을 걸었다. 나폴리에서의 시작이 아주 순조로웠다.


6. 베수비오 화산이 남기고 간 자국



아침이 밝았다. 이른 기차였다. 테르미니 역에 있는 카페에 아주 맛있는 크로아상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잠시 들렀다. 한국에서라면 절대 먹지 않았을 따뜻한 카푸치노에 크로아상 하나를 주문했다. 이탈리아의 커피는 카페인과 맞지 않은 내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고, 이탈리아의 우유는 유당불내증이 좀 있는 나의 속이 전혀 더부룩하지 않게 하는 신기한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어제 함께 돌아다닌 j언니와 d오빠는 우연히도 같은 기차였다. 둘은 피렌체로 간다고 했다. 둘이 먼저 떠나고, 나도 전광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탈리아의 기차는 타임어택이다. 약 15분 전에 전광판으로 플랫폼을 알려준다. 어쩔 땐 5분 전이기도 하다. 그때부터는 캐리어를 들고 달려야 한다. 해외에서 타는 첫 기차라 몹시 긴장되었다. 잘못 타면 어쩌지. 다행히 시간 넉넉하게 플랫폼이 떴다.


이탈리아의 기차는 종류가 두 개다. 하나는 국가 것인 트랜 이탈리아, 다른 하나는 사유인 이딸로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KTX와 SRT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기차는 이딸로였는데, 새 거라 깨끗하지만 안타깝게 짐 칸이 넓지가 않았다. 결국 좌석 위로 캐리어를 올려야 했다. 그러나 28인치짜리 20키로 가량의 캐리어를 여자 혼자 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낑낑거리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번쩍 들어서 올려주셨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정말 친절했다. 기차를 오를 때에도 계단이 있어 어려움을 겪었는데 앞에 있던 커플 남성이 도와주었고, 이번에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도와주셨다. 깜짝 놀랄 정도로 힘이 좋으셨다.


다음 여행지는 나폴리. 이탈리아 남부가 꼭 가보고 싶었다. 예전부터 나폴리에 대한 환상은 가득했다. 내리쬐는 태양과 푸르른 지중해, 낭만이 넘치는 풍경이 궁금했다.


나폴리는 마피아의 도시이다. 그래서 치안도 매우 좋지 않다고 소문이 나 있다. 로마보다 으슥하고 허름한 곳이 많고 외국인 관광객이 비교적 적다. 여자 혼자라 부쩍 긴장했지만, 주위의 남부에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최근의 나폴리는 꽤나 괜찮다고 했다. 축구의 영향이라고. 나폴리에서 대활약 중인 김민재 선수 덕에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가 아주 높아졌더랬다.


두 시간 반 끝에 도착한 나폴리에서 나를 맞아주는 건 회색빛 하늘과 추적추적 내리는 비였다. 로마에서의 다섯 날 모두 쨍쨍해서 우산 쓸 일이 없었는데. 주섬주섬 캐리어에 짱 박아 둔 우산을 꺼냈다. 내 몸만한 캐리어를 들고 우산을 쓰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심지어 나폴리역 앞 광장의 보도블럭에는 대각선으로 스크래치가 나 있어 네 발로 굴러가지가 않았다.


숙소까지는 트램을 타기도 지하철을 타기도 애매한 거리였다. 약 1키로 밖에 되지 않아 걷는 걸 택했는데, 금세 진이 빠져버렸다. 광장 앞에는 로마보다 더 노숙자가 많았고 인적이 드물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고생 끝에 도착한 숙소는 한 아파트먼트라 관광객보다는 현지인이 많이 사는 동네였다. 한적한 골목에는 온통 축구 우승을 축하하는 장식물들이 가득했다. 이 도시는 정말 축구에 미쳤구나. 온 동네가 축구였다.


넓은 창이 있는 아파트는 총 세 개의 방이 있었다. 나는 그 중 가운데 방이었다. 방에서 은은한 담배 냄새가 났다. 이렇게 큰 창문은 태어나서 처음 봤는데, 밖으로 비가 쏟아지는 풍경이 꽤나 운치있었고, 맞은편의 집이 아주 잘 보였다. 유럽 영화에서만 보던 풍경이다. 배가 출출해 조식으로 놓여 있던 빵을 들고 창가에 앉아서 먹었다. 오드리 햅번이 앉아서 문 리버를 부를 거 같은 형태의 창문이 마음에 쏙 들었다.


나폴리의 지하철은 굉장히 깔끔했다. 새까만 매연이 가득한 거 같던 로마의 지하철과는 다르게 한국의 9호선같이 깨끗하고 새삥의 역사였다. 지하철을 타고 향한 오늘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목적지는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이었다. 예전의 나의 꿈은 고고학자였다.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약 7년 정도 꿈꿨던 직업이었다. 고고학 러버로서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은 명성이 높은 박물관 중 하나다. 왜냐하면 나폴리 근교에 폼페이가 있기 때문이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유적들은 모두 여기있다. 나는 천천히 둘러보기 위해 약 4시간을 잡았다.


그 전에 배가 너무 고파서 현기증이 났다. 전시는 생각보다 체력을 많이 요하기에 든든하게 배를 채워야 했다. 이탈리아에 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지만 나는 밥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밥이 그리워진 참이었다. 안타깝게 나폴리에는 한식당이 없었다. 리조또라도 먹기 위해 검색을 했지만 이상하게 근처에 리조또 집도 없었다. 그러다 스시 도시락 파는 곳을 발견했고, 고민없이 들어갔다.


연어 초밥 도시락을 팔고 있는 작은 식당이었다. 점심시간을 조금 넘긴 시간이라 한적했다. 여러 종류의 스시가 담긴 도시락을 택했다. 만원을 조금 넘긴 가격으로, 나쁘지 않았다. 간만에 입에 넣는 쌀밥이 너무도 달콤했다.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은 규모가 매우 크다. 1층은 파르네제 컬렉션이다. 피카소가 보고 그린 스케치 같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뒷쪽에는 조각상으로 가득했다. 흔히 그리스로마를 생각했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들. 비슷비슷한데다 원체 조각에 흥미가 없어서 빠르게 넘어갔다. 1층에서 꼭 봐야하는 전시품이 있는데, 바로 파르네제의 황소와 파르네제의 아틀라스이다.


정중앙에 위치해 거대한 존재감을 뽐내는 파르네제의 황소는 고대 단일 대리석 블록 중 가장 큰 조각이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 중 테베의 왕 리코스와 디르케의 이야기를 다룬 조각인데, 리코스의 조카 안티오페는 뛰어난 미모를 가졌으나 제우스에 의해 임신을 하게 되고, 처녀의 몸으로 임신했다는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 도망치다가 그녀를 예전부터 사모하던 에포페우스에게 의탁하게 된다. 안티오페는 그곳에서 쌍둥이를 낳는다.


그러나 리코스는 에포페우스를 죽이고 안티오페를 강제로 끌고 오고 안티오페는 자식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다. 리코스는 안티오페를 자신의 부인 디르케에게 맡기고, 안티오페는 혹독한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그러다 안티오페의 두 아들이 어머니를 찾아오고, 어머니를 구하고 대신 디르케를 황소의 뿔에 묶어 복수했다. 이 조각은 이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파르네제의 아틀라스는 지구를 짊어지고 있는 아틀라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틀라스는 제우스의 삼촌인데, 제우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제압되었고, 그 벌로 지구를 받치고 있게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유명한 작품은 바로 다산의 아프로디테이다. 그간 알던 아프로디테와는 달리 유방이 수백 개가 달려 있는 모습이 조금은 징그럽다. 당시 유방은 다산의 상징이었고, 아프로디테는 결혼과 사랑의 신으로서 이 책임을 짊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하에는 이집트 컬렉션이 있다. 미라부터 시작해 장기를 담던 관과 장식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체력을 아끼고 로마 유적을 주로 보기 위해 빠르게 훑었다.


2층에는 폼페이 컬렉션이 펼쳐져 있다. 당시 로마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생활용품부터 도자기, 프레스코화 등이 가득하다. 로마의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던 폼페이는 각광받는 휴양지였다. 그러나 79년, 베수비오 산의 폭발로 인해 도시는 멈추어 버렸다. 당시 엄청난 폭발로 죽은 게 아니라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사람들은 각자 하던 행동대로 굳어져 버렸는데, 그 모습을 복제한 유물도 있다. 기어오르다가 그대로 굳어져 버린 모습이다.



이 컬렉션 중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바로 ‘플로라’이다. 이 박물관의 대표 유물이자 상징같은 존재이다. 왜냐하면 예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플로라는 꽃의 여신인데, 이 여신을 본 뜬 작품이 정말로 아름답다. 코발트 블루의 배경색과 여신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되어 있다.


2층의 또 다른 방에는 프레스코화로 가득하다. 프레스코화는 석회에 모래를 섞어 벽면에 바르고, 마르기 전에 채색하는 기법이다. 이미 굳어진 뒤에는 수정할 수가 없기에 만들기 꽤나 번거롭다. 이 아름다운 프레스코화 사이에 아주 유명한 작품이 있는데, 바로 ‘이소스 전투’이다.



이 작품은 다들 알렉산더 모자이크라고도 부르는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붙은 그 유명한 이소스 전투를 새긴 작품이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하고, 가운데의 알렉산더 대왕의 눈이 크고 동그랗다.


이 방에는 아주아주 은밀하고 특별한 곳이 있다. ‘비밀의 방’으로 불리는 이곳은 성인들만 들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19금 컬렉션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성인용품과 춘화 모자이크로 가득하다. 남사스러운 장면들이 노골적으로 표현된 모자이크는 폼페이의 유곽에 실제 있던 그림이라고 한다. 이 그림들은 흡사 메뉴판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유곽에서 해당 그림을 가르키며 체위를 선택했다고 한다. 사이즈별로, 형태별로 다양한 성인용품들을 보면서 옛 사람들도 지금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컬렉션이 있는 박물관은 처음이라 재미있었다.


들어온지 5시간이 훌쩍 넘고 나서야 어느 정도 다 볼 수 있었다. 천천히 돌아봤다면 거의 반나절은 소요되얺을 것 같다. 땡땡 부은 다리를 두드리며 다시 숙소 근처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머지 않은 곳에 스피카 나폴리라고 하는 관광지 골목이 있었다. 축구 때문에 골목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고, 군데군데 친숙한 킴의 얼굴이 보였다.


리조또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월요일이라 휴무인 식당이 많았다. 근처를 둘러보다가 식당에 들어가 볼로네제 파스타와 아페롤 스프리츠를 먹었다. 이제 아페롤 없는 식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뽀꼬 살레(소금 조금만 넣어주세요)를 외치지 않았는데도 간이 딱 맞았다. 로마가 조금 짜게 먹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로 어둑한 골목을 걸었다. 관광책자에서 주의하라고 하던 곳이었지만 축구의 열기가 가시지 않아 시끌벅적해서 나름 괜찮았다. 나폴리에서의 시작이 아주 순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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