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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로마의 숨결

70일간의 유럽 여행 (5) - 이탈리아 로마

by hye


영광스런 과거의 로마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 돌들에 담겨 있고, 이 시간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5. 찬란한 로마의 숨결



숙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였고, 갓 유럽에 도착했다고 했다. 나, 첫날에 내게 핀초 언덕의 노을을 보여준 J언니와 이탈리아 이후에는 스위스로 넘어간다던 새로 온 언니(이 언니도 J로 시작해서 소문자 j언니로 표기하겠다) 셋이서 한 방을 썼다.


우리는 이틀 정도를 함께 묵었다. J언니는 아침에 나와 생크림빵이 맛있기로 유명한 카페에 가서 카푸치노를 사주었다. 다른 유명한 빵도 있었으나 아직 나오지 않았고, 언니와 하나도 느끼하지 않은 크림빵과 고소함이 남다른 카푸치노를 먹었다.


밤에 우리는 모여 앉아 자신의 하루를 짧게 소개했다. 어디가 좋았다, 무엇이 맛있었다, 짧은 감상이었지만 혼자 온 우리에게 함께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오늘은 그 J언니가 떠나고, 나와 j언니만이 남겨진 로마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하루는 로마 시내에 온전히 투자하기로 했다. 일요일에 종종 콜로세움 무료 개방을 하는데, 마침 그 날이 오늘이라 우린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원래 내부까지 들어 갈 생각이 없었는데 무료라 하니 구미가 안당길 수가 없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줄이 길었다. 거의 한 시간 정도를 아침이지만 강렬한 햇빛 밑에 서 있었더니 금방 지쳤다. 지루함을 때울 동행인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무료 표를 받고, 이탈리아인들의 습관성 플러팅에 나도 손을 흔들어주며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밖에서 본 것보다 더 거대했다.



내부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후회했을 정도로, 내부는 정말 밖에서 보는 것과 느낌이 달랐다. 훨씬 더 거대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비교적 서늘한 돌그늘을 지나 가운데 경기장을 보고 있노라면 로마의 영광이 눈앞에서 재생되는 듯 했다.


콜로세움은 로마의 경기장 또는 원형 극장으로 쓰이던 곳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처럼 검투사들이 검투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가운데의 공연장 밑에는 지하 공간도 있어서 현재는 그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콜로세움에서 나와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작은 개선문이 보인다. 티투스 개선문이다. 그 옆으로 입장을 하면 바로 포로 로마노이다. 콜로세움에서 받은 티켓을 보여주면 이곳 또한 무료다. 로마인들의 생활과 정치의중심지였던 유적지이다.


멀리서보면 그저 돌무더기일지 몰라도, 이상하게 이 폐허에 서있으면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돌들마저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강렬한 로마의 5월의 햇살을 받으며 야외를 돌아다니는 것은 고역임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런 과거의 로마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 돌들에 담겨 있고, 이 시간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티투스 개선문 뒤쪽으로는 가파른 언덕이 있었다. 인적이 드문 길을 계속 올랐다. 길을 몰라서 다른 곳에서 헤매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다가 사람들이 보이자 그들을 따라갔다. 뜨거운 햇빛과 바닥난 체력으로 인해 기진맥진했다. 정말 쓰러지기 일보 직전, 이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보는 포로 로마노의 전경과 콜로세움까지 이어진 모습은 정말 절경이었다. 로마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면서 로마의 숨결을 느꼈다. 밑에서 보던 거대한 돌들과 기둥 토막들이 위에서보니 더욱 위풍당당했다.



자비없는 뜨거운 로마의 햇빛에 우리는 지고야 말았다. 한국과는 달리 공기는 건조하여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빈 속에 기를 쪽쪽 빨아먹는 햇빛과 대항하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마치 기어가듯이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직 까르보나라를 맛보지 않았다는 언니를 위해 볼로네제와 까르보나라를 주문했다. 뽀꼬 살레 (소금은 조금만 주세요)도 잊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스파게티 면이 아닌, 넓적한 모양의 파스타 면이었지만 맛은 좋았다. 매번 짭짤한 이탈리아 음식 공격에 대비한 탓인지 간도 적당했다. 겨우겨우 배를 채우고 남은 힘을 쥐어 짜 숙소로 걸어갔다. 이 애매한 로마의 교통이 처음으로 미워졌다.


밀린 빨래를 근처 세탁소에 맡기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이렇게 달콤한 낮잠은 처음이었다. 다시 일어나서 숙소에서 멀지 않은 젤라또집을 찾았다. 로마 3대 젤라또 중 마지막 집인 파씨. 이제 3대 젤라또를 다 먹어본 셈이다.


이곳의 시그니처는 바로 쌀맛인 리조이다.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아 한 입을 베어물었다. 음, 아주 익숙한 맛이었다. 단 맛을 뺀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쌀 뻥튀기를 더한 맛. 호불호가 꽤나 갈린다던데, 호도 아니고 불호도 아니었다.


로마의 밤은 상당히 위험하다. 특히 숙소가 있는 테르미니 역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언니와 둘이 밤에 쏘다니기 살짝 무서워서, 어제를 함께 보낸 오빠 한 명이 아직 로마에 있다길래 같이 야경 볼 것을 제안했다. 흔쾌히 수락한 덕에 같이 저녁을 먹으러 왔다.


로마에서 한국인들에게 꽤나 유명한 식당이었다. 얼마나 한국인 방문객이 많은지, 한국어 메뉴판도 있었다. 가장 유명한 소꼬리찜과 라비올리, 라자냐를 주문했다. 투박한 접시에 음식이 금방 나왔다.


소꼬리찜은 한국의 소갈비찜과 유사했다. 좀 더 새콤달콤하고 케첩 소스의 맛과 비슷할 뿐이었다. 입맛이 확 당기는 맛이었다. 라비올리 안에는 바질이 들어있었는데, 입에 향긋함이 확 퍼져서 기분이 꽤나 좋았다. 라자냐도 입맛에 잘 맞았다. 성공적인 식사였다.


셋 다 기분좋게 식사를 하고, 바로 앞에 보이는 서점에 들어갔다. 나는 서점 구경하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그 국가의 언어를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고 나라별 책 커버나 책 재질의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보는 재미가 있다. 외국의 책들은 거의 갱지를 써서 책이 가볍고 작다. 그 중 영어로 된 세계문학전집을 발견했다. 책이 너무 예쁘게 생겨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 한 권을 골랐다.


이탈리아 남부 디저트로 유명한 카놀리는 예전에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로마에서는 길에서 드물게 파는데, 마침 한 점포를 발견해서 주저없이 구매했다. 피스타치오 크림이 듬뿍 들은 와플모양의 과자가 둥글게 감싸고 있는 형태인데, 너무 달아서 한 입 먹고 버렸다. 맛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한참을 지나친 단맛이었다.



늦게 저녁을 먹고나니 그제서야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늦은 밤의 트레비 분수에 가서 동전을 던졌다. 로마에 돌아오기 위해 딱 한 번만 던졌다.


밤의 판테온은 더욱 자유로웠다. 사람들은 노상 카페에서 여유로운 만찬을 즐겼고, 학생들은 편하게 분수대 근처에 앉아 각자의 할 일을 했고, 버스킹을 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편안한 밤 분위기 속을 흠뻑 즐겼다.


다들 지올리띠의 맛을 보지 못했다고 하여 지올리띠에 들렀다. 계속 아른거리던 수박맛과 레몬맛을 골랐다. 베어물자마자 긴 밤의 더위를 싹 녹여줄 신선한 수박이 씹히는 기분이었다. 상큼한 레몬은 로마의 저녁과 아주 잘 어울렸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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