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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로지 Jul 24. 2024

실패에 대하여

코리아나, 손에 손잡고

 집에 온 뒤로 줄곧 코리아나의 ‘Hand in Hand’(손에 손잡고)를 듣고 있다. 훌륭한 노래지만 평소에 찾아듣는 곡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우연치않게 이 노래가 가슴을 울렸다.


 계기는 오전 10시 경 일어난 일이었다. ‘일’이라든가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거창하지만, 아무튼 내가 뭔가를 했다. 몇 달 전 응모한 공모전의 결과를 확인한 것이다. 결과 발표가 났다는 메시지를 봤을 때부터 심장이 쿵쾅거리더니, 고질적인 저혈압이 일시적으로 완화되기까지 했다. 이대로라면 아무것에도 집중이 안 될 듯하여 서둘러 결과를 확인하러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앗, 로그인 실패. 비밀번호가 틀렸댄다. 이거 불길한데.


 여차저차해서 심사결과를 확인해보니, 불합격이었다. 음, 그렇군.


챗gpt한테 실패의 이미지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인물의 비참한 심정이 느껴진다.


 실패는 익숙하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실패 경력직’ 답게 이런 결과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불합격 한다면 다 내가 부족한 탓이라며 겸허히 받아들일 각오도 했었다. 휴, 그래도 쉽지 않다. 이보쇼 심사위원들, 내 걸 보기는 한 거요? 왜 내 응모작이 떨어졌는지 설명하라면 설명해줄 수 있수? 그 전에 당신들이 누굴 심사할 자격이나 되는지 한 번 볼까? 그런 반항적인 생각도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일부러 의도한 게 아니라, 비 오는 날 (인간이 보기엔) 뜬금없이 내려치는 천둥번개 같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자연재해를 미리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심사위원들이 저에게 불합격을 주는 것도 못 막았군요, 이런.


 실패를 극복하는 법에 대한 한 가지 노하우라면, ‘극복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게 좋다. 애써 괜찮은 척 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다. 서서히 실패를 받아들이고, 낙담한 감정을 천천히 다독인 다음, 평온을 되찾으면 이번 실패에서 배울 점을 찾아보는 것이다. 과학적인 근거가 있냐고 묻는다면,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에 대해 심리학 책에서 본 것을 응용했다고 답하겠다. 다만 내가 봤던 게 책이 아닐 수도 있고, 정확한 주제가 일상적인 슬픔인지 병리적 트라우마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적어도 심리학자가 썼다는 부분은 맞길 바란다. (너무 허술한가요? 그래서 제가 불합격한 걸까요? 너무 뒤끝이 길군요, 죄송합니다.)


 그런 내 방식에 충실해 멍한 시간을 보내는 도중, 라디오에서 웅장한 노래가 튀어나왔다. 가사가 “손에 손 잡고~”는 아니고 “Hand in hand we stand~”였다. 무심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명곡이네.’였고, 다른 하나는 ‘영어가 원곡인가?’였다. 전자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어도 어쩔 수 없지만, 후자 같은 의문은 명확한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인터넷 시대의 좋은 점은 아무리 멍청한 질문이 있다고 해도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빨리 검색하니, 이 노래가 88 서울 올림픽 주제가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데자뷰처럼 전에 한 번 알았던 정보라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아마도 주워 들었지만 관심이 없어 장기 기억 해마에 저장되지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데이터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참고로 나는 1988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부모님이 서로의 존재를 알기도 전이었다. 내가 코리아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지금은 중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연예인 클라라의 아버지가 있는 그룹이라는 것 뿐이었다. (이제 보니 가족 그룹이라 고모도, 삼촌도 코리아나였군요.)


 솔직히 “손에 손잡고”는 좀 올드하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구시대적이랄까, 새마을운동을 연상케하는 찝찝함이 있다. 평소의 기고만장한 나였으면 그렇게 여겼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실패의 아픔을 곱씹으며 한껏 세상에 겸손해진 채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아, 노래가 가슴을 울린다.


 어떤 선배가 “이번 서류는 올림픽 정신으로 넣었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올림픽 정신’이 무엇인고 했더니, ‘참가에 의의를 둔다’는 말이었다. 호오, 그런 사고방식이 있었군.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준비도 안 됐고, 패기도 없다’라는 의미를 좋게 포장한 줄만 알았다. 몇 년을, 어쩌면 평생을 열심히 준비한 올림픽 대회인데 고작 참가가 대수라고? 은메달리스트도 기억 못 하는 1등 제일주의 세상에서 과연 그럴까? 되려 세금 낭비라며 질책이나 당하지 않을까?


 올림픽 시즌이면 뉴스에 항상 나오는 장면이 있다. 아프리카 등의 제3세계에서 부족한 지원에도 불구, 어렵게 준비해 대회에 참가한 선수를 인터뷰하는 장면 말이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소감을 말한다. 대개는 올림픽에 나온 것이 행복하며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이다. 나는 항상 그런 선수들이 어떤 기적을 보여줬으면 하고 바라지만, 할리우드 영화 같은 대역전극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부진한 성적을 남기고 고국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경기는 냉정하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행복할까? 참가만 해도 대우 받을 수 있는 나라에 살아서? 모를 일이지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나라라도 참가보다는 메달을, 은메달보다는 금메달을 좋아할 것이다. 안 되는 도전을 계속 하는 것은, “역시 너희는 세계무대에서는 안 돼.” 하는 주장만 더 키워주는 꼴이지 않을까? 그런 노파심이 생겼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실을 감는 패의 이미지를 달라고 했다. 아무튼 실패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심장의 두근거림을 조금 가라앉힌 뒤 내 응모작을 다시 살펴봤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거진 대상까지 받을 가치가 있어 보였는데, 불합격이란 걸 알고 보니까 완연한 실패작처럼 보였다. 이게 안 되는 게 당연하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지어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라는 초긍정적인 사고에까지 이르렀다.


 만약 내가 작업을 완성해놓고도 응모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부족함도 모르고, 아집에 꽁꽁 둘러싸인 채 구두쇠처럼 혼자 자화자찬하고 있었겠지. 세상에는 그렇게 먼지만 쌓인 작품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평가 받는 자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귀중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가 볼 수 있음은 어쩌면 특권이라 할 지도 모르겠다. 너무 과한 해석이려나.


 그러고보니 ’손에 손잡고‘가 라디오에서 나온 것은 곧 있을 파리 올림픽 때문이었다. 마침 올림픽 정신을 되새기기에 좋은 시기인 셈이다. 아무쪼록 모든 참가자들의 건투를 빌며, 특히 우리나라 선수들은 메달 색깔과 관련없이 좋은 기회를 잘 누리고 왔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말: 아무리 생각해도 88년생과 02년생을 한꺼번에 MZ세대라고 부르는 건 무리가 아닌가요? 2002 월드컵을 보고 안 보고는 인생에 큰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88올림픽을 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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