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구#임사빈#이재창
1990년대 지방자치시대를 시작하면서 도민들이 민선 도지사를 선출했다. 1995년에 민선 최초로 이인재 도지사가 취임했다. 이어서 임창열도지사, 손학규 도지사에 이어 김문수 도지사는 재선으로 8년간 일했다.
그리고 남경필 도지사에 이어 이재명 현 대통령이 도지사에 취임해 4년간 도정을 이끌었고, 현재는 김동연 도지사가 광교청사에서 도지사로 도정을 총괄하고 있다.
현재를 민선도지사 시대라고 한다면 1995년 이전까지를 관선도지사 시대로 칭한다. 대통령이 임명한 경기도지사는 28명이다. 조선시대 왕이 27명인것과 무관하겠지만 기억을 돕기위해 언급해 본다.
경기도청 공무원으로 근무를 시작하는 그해에 염보현 도지사를 만났다. 당시 9급 공무원은 본청아닌 사업소에 근무해서 도지사는 월례조회에 참석하여 높은 단상위에 자리한 모습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988년 공보실에 근무하면서 임사빈, 이재창 도지사의 간부회의 음향을 듣고 도정 가십기사를 경인일보, 경기일보에 실었다.
리얼한 표현으로 보태자면 경기도청의 간부회의를 선의로 盜聽(도청)해서 도정홍보자료로 활용하는 작업이었다. 1도1사에서 4개 지방지가 활보하는 전환기의 이야기다. 당시 7급 공무원의 기억과 이후에 만난 경기도출신 도백의 이야기를 경기일보 ‘천자춘추’에 기고한 바인데 그중 몇분 도지사님 이야기를 여기에 전해드리고자 한다.
<안성출신 이해구 도지사>
요즘 경찰청장인 1980년대 치안본부장 출신으로 제20대 경기도지사에 발령된 이해구 도지사. 1984년10월부터 1986년1월까지 경기도지사로 일했다.
1980년 9월에 도지사에 취임한 염보현 도지사도 치안본부장 출신이다. 당시에는 경찰이 내무부장관 소속의 기관이었으므로 치안본부장을 도지사로 발령했다. 이해구 도지사는 안성 출신이다.
제13대 김태경 도지사(1971년6월~1972년6월)가 평택출신으로 최초의 경기도 출신 도지사였고 두 번째로 이해구 도 출신 도지사가 취임한 것이다. 이어서 22대 임사빈 도지사와 25대 윤세달 도지사는 양주 출생이고 23대 이재창 도지사는 파주 출생이다.
이해구 도지사는 화합으로 영광경기, 책임으로 지역안정, 창의로 헌신봉사, 특성 있는 균형개발, 향토애로 문화창달이라는 도정 방침을 정했다.
치안책임자로 일하다가 도지사로 발령되었지만, 하위직 8급 공무원의 느낌에는 지방행정과 중앙행정에 능통한 인물로 보였다. 특히 월례조회에서의 훈시는 연설형태가 아니라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와의 대화 같았다.
취임 초 월례조회에서 어떤 상황을 설명하다가 매우 구체적인 사례를 설명하였다. 행정이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한 설명이 길어지면서 어색한 흐름이 보이자 ‘이 정도로 합시다.’하면서 급하게 회의를 마치려 했고, 옆자리에 참석했던 백세현 부지사가 ‘경기도의 노래’ 제창이 남았다고 조회 일정을 설명하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이해구 도지사 재직 시는 물론 공무원 근무 내내 중요 보직에서 일했고 퇴직 이후에도 왕성한 공직 활동을 이어가는 권두현 전 부지사(현 지방행정동우회 회장)의 회고를 듣고자 동우회 사무실로 찾아갔다.
△이해구 도지사님에 대한 기억 중 첫 번은 경기도 내 읍면동 대부분을 방문하셨다는 흔하지 않은 기록이다. 연천군, 양평군에서는 현장에서 1박을 하면서 도민들의 의견을 들었다. △김태경 지사님이 평택시 출신이신데 경기도 출신(안성)으로는 두 번째로 도지사로 취임했다. △경기도 체육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해구 지사님은 도 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하지 말고 도내 시군의 회의실, 식당을 이용하도록 했다. △공관 지하수 수질이 좋으니 수도 파이프를 밖으로 연결해서 인근 주민들이 식수로 이용하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후덕한 성품이었다.
△공관주변 시민과의 반상회에서 ‘연기를 내는 식당을 막아달라’는 건의에 대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라며 주민들의 이해와 식당주인의 연기발생 최소화를 주문하여 갈등을 중재했다.
8급 공무원의 기억이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이해구 도지사님의 도지사직은 행정가로서의 마무리였고, 이후 정치인, 교육자로서 더 많은 일을 했다.
도지사실을 나와 13대 국회의원, 내무부장관(1993. 2월~12월), 14, 15, 16대 국회의원으로 일했다. 두원대학교 학장과 총장으로 일했다. 47세 도지사는 정치의 시작이었다.
<양주출신 임사빈 도지사>
‘임꺽정’, ‘임두목’으로 불린 임사빈 경기도지사(1987.12~1990.6)는 중앙(내무부)과 경기도, 그리고 국회에서 큰 활약을 했다. 공무원 말단에서 시작해 도백에 오르고 국회의원을 한 분이니 그 인생은 늘 새로움과 기록의 연속이었다. 경기도 출신 도지사라는 긍정의 평가도 높았다.
2년6개월간 재임한 임사빈 경기도지사는 공직자와 언론의 반대에도 기채를 내서 의왕~과천 유료 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맨땅의 헤딩’으로 보였지만 오늘날 ‘수도권 순환도로’로 개칭논의가 활발한 수도권외곽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수원, 의왕과 과천 교통의 중심이 되었고 경기남부~서울~경기 북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임사빈 도지사는 내무부 근무 시에도 보스형 공직자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공보부서 근무를 하다가 승진해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수많은 내무부 출입기자들이 이분의 방을 들락거리며 기사를 취재했다고 들었다. 그만큼 선 굵은 인물로서 늘 큰 그림을 많이 그렸다.
일화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토요일 오후에 이른 숙직을 하고 있는데 시ㆍ군에서 정보사항이 들어왔다. 성남시 어느 공원에 도지사가 오셨단다.
혼자서 경기1가1000번 승용차를 운전해서 오셨단다. 당직실은 비상이 걸렸다. 인근 시ㆍ군 당직실에 전화해서 관내에 도지사가 가실 수 있으니 대비하고 동향보고를 해달라 전했다.
당시에는 그랬다. 도지사가 시군지역을 가는 것은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임명직 시장ㆍ군수들은 토요일 오후에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삐삐가 일부 보급되던 시절이니 비상연락이 쉽지 않아 당직실 근무자들의 고충이 컸을 것이다.
임 지사의 무게감은 대학생 도지사실 난입사건에서 입증됐다. 어느 날 대학생 5명이 비서실 책상을 부수고 화염병을 들고 도지사실에 난입했다. 도지사는 수행원과 함께 옆문으로 피신했고 부지사가 남아서 대응했다.
윤세달 부지사는 ‘내가 도지사다’라며 버텼고 학생들의 각목 공격을 주변의 육사출신 과장과 또 다른 계장이 막아냈다. 두 공무원은 표창을 받았다. 부지사는 화장실을 직접 뒤지며 대학생들을 수색하고 체포했다.
상황이 종료되자 임사빈 도지사가 기자실에 찾아와 보도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보안이 뚫린 것은 사실이기에 도정 책임자로서 언론에 보도하지 않도록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직전까지 카메라를 동원해 도지사실과 비서실의 파손된 집기를 촬영해 언론에 알리려 한 간부들은 머쓱했다. 역시 큰 인물은 세상도 넓게 본다. 당시의 7급 공무원은 그렇게 느꼈다.
<파주출신 이재창 도지사>
늘 깔끔한 외모에 샤프한 인상으로 경기도 부지사와 도지사로 일하신 이재창 도지사(1990년 6월~1992년 4월)는 경기도 출신(파주)이어서 임사빈(양주) 도지사 이후 또 한 분의 도 출신 도백으로 환영받았다.
젠틀한 외모만큼 업무처리도 철저하신 분으로서 도지사의 모든 결재서류에는 늘 체크와 수정이 있으므로 담당 사무관들은 항상 신경을 쓰면서 결재를 받았고 결재가 나오면 문서 전체를 살피기도 했다.
여러 부서의 결재서류가 밀리면 비서실에서 한곳에 모아 보자기에 싸서 공관 서재에 올리면 외부출장에서 돌아오신 도지사께서 심야에 결재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더욱 수정이 많이 나올 가능성이 컸다고 한다. 공관에서 차분히 서류를 보게 되니 그러할 것이라 당시 공무원들은 추측했다.
이제는 퇴직하셔서 60대 후반이 되신 좋아하는 공직 간부의 1999년 회고. 이재창 지사님의 결재문서가 수정 없이 나왔기에 참 신기한 일이다 싶어서 끝까지 문서를 살펴본바 마지막 장 시군에서 올라온 서류의 오자를 발견하시곤 결재하신 사인펜으로 수정한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김인규 선배의 증언)
이재창 지사는 결재문서에 신경을 쓰심은 물론 결재문서 앞에 붙이는 ‘요지’조차도 관심을 가졌다. 도지사의 결재를 받는 문서조차 이면지를 쓰도록 했다.
그런데 직원들 사이에 나온 이야기 중에 “우리 과는 일부러 ‘글씨가 적게’ 이면지를 만들어 도지사님 결재요지를 붙였다”는 동향보고를 들으시고 그렇게까지 하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간부회의에서 말씀하셨다.
예산부서 선배님의 회고. 내무부(정부)의 승인을 받던 예산을 지방의회가 심의하게 되었지만, 이재창 도지사님은 세세하게 예산 내용을 검토했다.
이에 과장, 계장은 말 못 하는데 당시 6급 차석, 그 선배가 “지사님, 오늘 밤 안에 결재를 하셔야 한다”고 직언을 했단다. 그날 밤과 다음날 새벽까지 공관에서 밤을 새웠단다. 같이 근무한 선배의 자랑은 여러 번 반복됐다.
장마철에 재난이 발생하여 비상발령으로 이른 새벽에 4층 회의실에 도착하니 이미 이재창 도지사가 재난상황을 지휘하고 있었다. 늦게 도착한 간부들이 송구한 자세로 도지사께 인사를 드리면, 그 자리에서 그 간부에게 맞는 재난대비 대책을 지시했다.
부지런하고 열정 있는 도지사로 일하셨다. 도민을 만나는 행사장에서도 늘 정성을 다하는 자세가 돋보였다. 그 정성으로 이후 3선 국회의원으로 국정을 이끌었고 새마을중앙회장을 거쳐 이제는 경기도민회 회장으로 봉사하시는 이재창 도지사님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김포 심재홍 도지사#양주 윤세달 도지사>
천자춘추 필진으로서 마지막 기회인 듯한데 준비된 원고가 두 편이어서 심재홍, 윤세달 도지사님 두 분 소개의 글을 묶어 송고하면서 경기일보 애독자들께 인사드린다.
이는 마치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 12부에 나오는 해관(解官)처럼 느껴진다. 관직은 교체되는 것이니 놀라지 말고 연연하지도 말라. 그런 마음으로 졸필(拙筆)을 마감하고자 한다.
제24대 심재홍 도지사는 부지사를 거쳐 인천시장을 하신 후 도지사로 금의환향(錦衣還鄕)했다.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본인 소개 글을 찾았다.
‘29세부터 31년간 격동기에 대한민국에서 공직자로 일했다. 육군 헌병장교를 거쳐 38세에 대전시장, 50세에 전북도지사, 56세에 인천직할시장, 그리고 59세에 제24대 경기도지사로 일했다.
1978년 2월부터 1980년 5월까지 경기도 부지사로 일했다. 경기도청 자료실에서 27년 전에 발행한 심재홍 도지사 연설문집을 찾았다.
1992년 4월21일 도지사 취임식에서 지역자치의 확립을 강조했다. 지방자치는 도와 의회가 함께 하는 양 수레바퀴와 같다고 말했다. 1992년 7월6일에는 새질서 새생활 5대 밝은 정신 회복운동을 제창했다.
근면, 도덕, 준법, 신뢰, 절약. 5대 밝은 정신이 신선한 바람으로 움츠린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다시 한번 일깨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내 각 기관과 시군을 다니면서 이 운동을 제창했다. 도민운동 심재홍이다.
윤세달 도지사는 양주분이다. 부지사로 근무하실 당시의 모습을 더 깊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1988년 6월부터 1989년 12월까지 부지사로 근무했다.
대학생 4명이 각목과 화염병을 들고 임사빈 도지사실에 난입했다. 도지사를 인질로 잡고 학생운동을 이어갈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윤세달 부지사는 발 빠르게 도지사를 옆방 상황실로 피신시키고 자신이 대학생들과 대치했다.
그는 “내가 도지사다! 너희는 누구냐. 칠 테면 쳐봐라!” 강단 있게 대응했다. 대학생이 각목으로 윤세달 부지사를 위협했고 사무관 2명이 재빠르게 각목 공격을 막아냈다. 사무관은 손가락 골절상을 입었다.
이날 대학생들에게 말씀하신 대로(내가 도지사다!) 1993년 3월부터 1년간 경기도지사로 일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울산시장으로 일했다. 어느 날 대기업 노조원들이 시장 관용차를 불태우고 시청에 불을 지를 분위기였다. 피하지 않고 시위 노조원에게 운동장으로 모이라 했다.
그는 “시청을 불태우면 여러분의 호적이 불타고 노조원과 시민들이 손해를 보는 일”이라며 설득에 성공했다. 현장행정 윤세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