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보내는 남편의 편지
열무김치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농산물시장에 가면 늘 여리여리 열무김치 식재료를 살펴보는 아내가 있습니다. 최근 장맛비로 농산물 가격이 올라가고 있지만 열흘전에 담근 열무김치통이 바닥을 보이는 상황이라 오늘 비싸지만 열무 3단을 용기내어 집어들었답니다.
저녁을 먹은 후 미리 소금에 저린 열무를 조심스럽게 씻어낸 후 물기를 빼내는 가운데 각종 양념, 이른바 종합양념, 갖은양념을 준비합니다. 대략 어깨너머로 보면 풋고추, 양파, 고추가루, 마늘, 실파 등 다앙한 재료가 들어갑니다.
어떤 재료는 담근 김치에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마늘은 곱게 갈아서 눈에 띄지 않습니다. 반면 풋고추는 잘게 썰었으니 잘 보이고 실파도 1cm길이로 열무 틈새에서 존재감을 자랑합니다.
고추가루는 잘잘하니 그 모습이 보일듯 하지만 스스로 녹아내려서 붉은 색으로 존재합니다. 모든 재료가 열무 주변에 모여서 각자의 존재감을 나타내기도 하고 어떤 재료는 숨어서 그 역할을 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열무김치 재료중에 열일을 다하는 찹쌀죽이 있습니다. 어려서도 본 바 있는데 여름에 김치를 담그면서 찹싹이나 밀가루로 죽을 쑤어서 함께 넣었습니다.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그냥 풋내를 잡아주는 기능이라 알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유산균의 먹이랍니다.
김치속에서 유산균이 활성화되어야 맛갈스러운 김치가 완성된다고 합니다. 그 기능을 하는 유산균에게 찹쌀이나 밀가루로 죽을 쑤어 먹이는 것이랍니다. 그 과정에서 김치가 숙성되고 어른들이 좋아하고 아이들은 덜 좋아하는 살짝 숙성된 김치가 완성되는 것이랍니다.
우리는 융합이라는 말을 쓰면서 새로운 트랜드로 삼아야 한다고 합니다. 소통과 융합은 건물 관리사무소의 만능키, 호텔 지배인이 인계인수하는 마스터키, 크고 작은 조직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는 키워드로 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적기를 타고 떠올라 2시간이 지날즈음에 만나는 비빔밥은 깔끔한 식재료가 좁은 그릇안에서 작은 숫가락으로 섞일때 제맛을 냅니다.
작은 고추장 팩을 눌러짜서 조금씩 음식에 발라먹는 맛이 있습니다. 평소 집이나 식당에서는 풍성하여 과다할 정도의 양념장을 주니 그 맛이 맥거나 짜다 하겠습니다만 비행기가 수천m 상공에 올랐을때 받게되는 작고 예쁜 고추장 팩은 마지막 치약 짜듯이 끝까지 눌러서 꼬물꼬물 나오는 최후의 고추장이 출구를 나오올때 한번 더 섞이면서 내는 맛을 그 맛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밤 늦은 시각까지 썰고 갈고 빻아서 물과 함께 초콜릿 색상의 플라스틱 그릇에 풍성하게 담아낸 여리여리 열무김치는 2일정도는 거품을 내며 숙성할 것이고 3일이 지나면 김치냉장고 중앙에 자리할 것입니다. 서서히 숙성되고 익어가는 김치를 다시 작은 통에 옮겨담고 매 끼니마다 꺼내서 열무를 먹고 그 주변에 함께한 갖은 양념을 음미할 것입니다.
과식해도 탈이 없을 것 같은 여리여리 김치가 잘 익어가고 있습니다. 어젯밤에 통에 담았으니 하루반 정도는 식탁위에서, 그 아래에서 숙성의 시간을 거칠 것입니다. 요즘같은 더위, 열대야에서는 하루정도만 실온에서 유산균의 활동을 응원하다가 보글뽀글 거품이 일면 그 느낌에 따라 냉장고에 넣어둘 시간이 정해질 것입니다.
정성들여 끓여낸 찹싹죽을 먹고 성장할 유산균이 5억일지 10억일지 그 이상인가는 몰라도 이 시벽에 아내의 여리여리한 재료가 담긴 열무김치통 안에서는 벌써부터 유산균의 잔치가 시작되었고 아마도 밤새 유산균의 자자손손은 50대조 할아버지를 지나 그들만의 자자손손 생명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다시 18대조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손자가 김치를 꺼내 먹으면서 역시 우리것은 좋은 것이라던 국악인 광고를 회고하면서 전통의 맛에 감동하고 만들어지는 과정에 공감하면서 '음식은 손맛'이라는 그 맛을 새롭게 인식할 것입니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김치를 담가도 재료를 만지는 손의 강도와 온도, 재료를 넣는 과정과 순서, 어슷썰기로 썰어낸 재료와 도마위의 두드림, 그리고 믹서의 현대적인 기능에 의한 융합결과로 여리여리 맛갈스러운 김치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푸른내가 나고 텁텁한 재료들이 유산균과 찹쌀죽이 소통하고 융합해서 만들어내는 숙성의 맛을 완성해 낼 것입니다.
늦은 시각까지 김치를 담그느라 애쓴 저녁형 아내에게 새벽에 일어난 아침형 남편이 그 수고함을 격려하고 고마움을 글로 써둡니다. 주방에서 물기를 빼고 있는 재료 손질과 버무림에 쓰인 플라스틱 그릇을 포개어 제자리에 보관합니다. 어제 김치담그기를 도와주지 못한 남편의 미안함의 표현입니다.
아내는 매일아침 남편의 글을 읽으며 하루일정을 가늠하고 글로 보내고 읽어서 답하는 또다른 소통과 융합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평소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부부이면서 글로 소통하는 남편과 아내입니다.
수고했어요 여보.
당신의 여리여리 열무김치는 다른 어느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미식가의 한국형 김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