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텃밭의 오랜 터줏대감, 부추.
부추는 그냥 두면 혼자 번져.
10여 년 전. 심어두기 무섭게 쑥쑥 자라난다는 도시괴담 같은 이야기를 굳게 믿고 검은색 직사각형 화분에, 이웃에게서 얻어 온 부추 뿌리 네댓 개를 심었었다.
이내 맛있는 부추 반찬을 먹을 기대에 좁은 다용도실 한자리를 내어주었는데, 부추가 채 자라기도 전에 나에게 정신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버둥거리며 길고 긴 암흑 속을 헤쳐 나오느라 부추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렇게 잃은 시간이 2년 반.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나날들이었다.
흙놀이를 즐기던 내가 흙과 식물에게서 흥미를 잃으면 '내 정신이 피폐해져 있다.'는 의미라는 것을
절절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매일이 그저 메마르고 건조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다 지나간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비워내고 다시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먼저 현관 근처의 화분 정돈을 시작했다.
죽은 나뭇가지와 잎을 제거했고 벌레가 꼬인 흙들을 비워 내었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팽개쳐있던 흙 뭍은 화분들을 꺼내와 빗속에서 화분 설거지를 했다.
크기에 맞춰 착착 포개지는 화분들을 보면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현관 쪽 화분 정리를 얼추 마치고 뒤편 다용도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수납장 맨 위쪽으로 검은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내가 잘 못 했다.
아무도 지켜봐 주지 않았는데 그 긴 시간 동안 부추는 혼자 꽃대를 올리고, 피고, 지고, 죽은 듯 쓰러져있다 간간히 들이치는 빗물에 이내 새 줄기를 올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푸른 부추 줄기 사이로 뽀얗고 하얀 부추꽃들이 '이제 괜찮아졌냐?'라고 묻는 듯 곱게 피어나 있었다.
가냘프게 피어오르는 하얀 부추꽃은 부추를 질기게 하고 성장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바로 제거해 버리는 대상이기에 일반적으로 마트에서 부추를 구입하는 소비자들은 만나기 힘든 꽃이다.
밥반찬으로 익숙한 채소가 이리 고운 꽃을 피우는데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볼 기회조차 없다니 이것 말고도 우리가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 본다.
부추 줄기 사이로 총총 고개를 내민 부추꽃대를 여럿 따다가 작은 컵에 꽂아두면 화원에서 사 온 꽃 부럽지 않은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려나..
이런 소소한 즐거움.
그래.
나는 이런 것이 필요했었다.
살아 보자.
작디작은 화분에서 기운 없이 지내고 있던 부추들에게 천연 액비를 만들어 뿌리고 흙을 보충해 주어 겨우 일으켜 세웠다.
당장이라도 널찍한 화분에 옮겨주고 싶었지만, 이사를 앞둔 시기였기에 분갈이는 몇 달 후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마당 딸린 집으로 이사 간 첫 주말. 가장 먼저 부추 분갈이를 감행했다.
힘겹게 버텨준 세월에 대한 보상으로 40리터 큰 화분 2개에 부추 뿌리를 나눠 심어 두고, 빛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매일 물을 챙기고, 강한 햇볕에 잎이 질겨지거나 색이 상할까 싶어 하루 일조량은 6시간 이내로 조절했다.
혹시나 화분에서 영양분이 모자랄까 염려스러운 마음에, 달에 한 번은 넉넉히 거름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진 세월을 견뎌냈으니 새 화분에서 영양을 충분히 흡수하고 잘 자라주길.
분갈이를 하는 내내 주절주절..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부추에게 건네었다.
우리집에서 고생을 해서 그렇지 본래 부추는 물도, 햇빛도, 거름도 좋아하는 욕심쟁이 식물이다.
그렇게 축적한 양분으로 땅 속에서는 뿌리들이 발달을 하는 동시에 흙 위로는 초록 부추싹을 삐죽삐죽
연이어 돋아내며 몸집을 키워낸다.
엉키듯 자란 뿌리들은 두어 해에 한 번씩은 캐내어 싹이 올라온 부분을 기준으로 분리해 심어주면, 금세 식구들을 늘려 자라주는 기특한 녀석이다.
부추를 옮겨 심을 때 팁이라면 오래되고 기다란 뿌리들을 짧게 잘라 식물에게 생명의 위협 주는 것이다.
이는 파를 키울 때도 적용 가능한 것인데, 뿌리 활착과 새 환경 적응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 역시 유튜브 영상과 블로그 글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따라 오래된 뿌리들을 잘라낸 후 심지만,
여태껏 잘 자라준 뿌리들을 잘라낼 때마다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찝찝하고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여러 개의 포기 나눔으로 개체를 늘려주었고, 더러는 새로운 씨앗들을 곁에 흩뿌려 혹시 모를 죽음을 대비해 주었다.
성장과 관리
부추의 생명력은 뿌리에서 뿐만 아니라 그 줄기도 대단한데, 두 뼘 가량 자라난 부추 줄기를 흙에서 가깝게 싹둑 잘라 내어 먹어도 다음날이면 삐죽 새로운 줄기가 얼굴을 보인다.
그리고 다시 2주가량이 지나면 처음 수확 때의 길이로 원복 되어 식탁에 오를 준비를 마친다.
부추가 이렇게 폭풍 성장을 하려면 앞서 말한 거름과 물 관리가 필수다.
잎 끝이 타거나 부추 줄기의 굵기가 얇으면 부추를 한번 더 짧게 잘라내고 해조류 성분이 들어있는 액비를 공급해 준다.
그 마저도 구하기 마땅치 않을 때에는 달러시티 (한국의 경우 다이소) 등에서 판매하는 복합비료 알갱이를 뿌려서 영양을 공급해 준다.
글로 적고 보니 손이 많이 가는 듯 하지만 물 주는 것 외에는 한 달에 한번 정도의 비료 공급이 전부.
무관심한 관심(?)만으로도 쉽게 키울 수 있다.
나눔
넉넉한 사이즈의 화분에서 부추를 키워내는데 가장 큰 문제는 한 번에 수확하는 엄청난 양이다.
한 달에 두 번 수확하는 부추의 양은 마트에서 파는 부추 6단 정도인데, 이 많은 부추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인 가족의 단출한 살림인 탓에 수확한 부추는 깨끗하게 세척해서 키친타월로 감싸 포장한 후에 주변 지인들에게 나눔을 한다.
나의 '화분텃밭'의 부추를 애용하는 지인들은 이 지역 한인마트에서 판매되는 시들어서 흐느적거리는 부추와는 차원이 다르게 신선한 '화분텃밭'표 부추를 늘 반겨준다.
해외 이민생활에서 한식을 구현해 낼 수 있는 무농약의 신선한 식재료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기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인들과 나눔을 하고도 남은 부추는 맑은 조개탕의 고명으로, 무침으로, 때로는 부침개로 변신해서 부부의 식탁을 채운다.
요즘처럼 날씨가 유난히 추운 시기에는 현지의 한국 슈퍼를 가더라도 신선한 채소를 찾기 어려운데 화분에서 키운 부추를 바로 취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웃에게서 얻어온 부추 뿌리들은 크고 작은 화분에서 근 10년을 함께하며 나와 가족의 빈 속을 채워주고 이제는 지인들의 식탁에까지 오르고 있다.
'그깟 풀 한 포기가 뭐라고?'
가볍게 여길 수 있는 풀 한 포기에 지나지 않지만, 부추 특유의 따뜻한 성질 탓인지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 모를 따뜻한 충만함이 내가 기른 부추를 먹을 때마다 느껴진다.
친구들과 실내포차에서 시켜 먹던 부침개, 백숙과 함께 곁들였던 무침, 학교 가던 길 옆집 화단에서 자라나던 어린 부추들..
부추를 먹을 때마다 한국에서의 시간들이 소환되곤 한다.
화분에서도 잘 자라주는 부추를 키우는 것은 나처럼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정서적으로나 건강을 위해서나 좋은 옵션이 돼주리라 믿는다.
마음이 헛헛하고 속이 빈 듯한 날, 그들도 직접 키운 부추가 채워주는 신기한 포만감을 내 손으로 키운 부추를 통해 느껴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https://youtube.com/shorts/GLsnRacGnDA?si=Tbbxii2ZZHEsHlL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