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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liviate
Nov 18. 2024
지난 "번아웃"글에 이어 이번에는 "여유"가 키워드다. 당시에 일도 많았고, 사적으로도 하고픈 일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다. 업무시간에 해야 할 일은 줄어들어, 눈치껏 휴대폰 보는 일이 잦아졌다. 퇴근 후에 가고 싶은 곳도 많았고 운동도 하고 싶었는데 결국 쉬지 않고 움직이다 다리에 염증이 생겨버렸다. 그것도 잘 완치되지 않는 아킬레스건염... 그래서 어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회사에서는 사무실에 콕, 퇴근하고 나서는 집에 콕 박혀 있는 중이다.
혼자서 살기 시작한 지 2년째,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나에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장소를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회사와 집만 왔다 갔다 하는 지금 상황이 너무 답답하기만 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프리랜서인 내가 내년 세금처리를 위해서는 올해 안에 모든 처리를 끝내놓아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절세상품, 비과세 상품들을 알아봤다. 그러다 보니 연금 상품에 가입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미래를 준비하게 됐다. 처음 듣는 생소한 개념들을 공부해 나가며 금융지식도 조금 쌓아봤다. 며칠 지났다고 벌써 잊어버렸지만 괜찮다. 그래도 약간의 세금은 절약했다.
일주일정도 공부하고 나니, 돈과 멀어지고 싶었다. 그래서 잘 읽지 않는 소설책을 한 권 골랐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책인데 잠도 참아가며 읽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해서 바로 영화도 봤다. 다음날 까지도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었다.
또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어,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 3시, 도서관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에 양귀자 작가님의 책을 좋아했던 터라, 읽고 싶은 책을 검색해 봤지만 누군가 이미 대출해간 뒤였다. 아쉬웠지만 신간도서 중에 하나, 업무 관련 도서 하나, 관심 있던 잡지책 하나를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몰라 1시간씩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이제는 세 권을 고르는데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집안 청소를 깨끗이 했다. 밀린 설거지를 하며 주방도 깨끗하게 소독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나서 손걸레질도 해주었다. 잠자리도 찝찝해서 베개 커버도 바꿔주고, 이불은 먼지를 탈탈 털어 일광욕도 시켜주었다.
의미 없는 하루로 보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의미 있는 하루를 부여하기 위한 일들을 하게 만들었다. 이불속에 붙어있고 싶은 마음을 떨쳐내고,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올 한 해를 만들었다.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나니, 다른 일들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격증을 딴 것도 아니고, 어떤 타이틀을 얻은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의 풍요로움 조금, 미래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 조금을 얻었을 뿐이다. 이 조그만 마음이 나를 살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