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지을 때 AI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얼마 전, 강의장 문밖을 기웃거리던 한 현장직 노동자의 뒷모습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꽤 확신에 차 있었다.
현장의 숙련된 감각과 AI의 방대한 지식이 만나면,
이른바 ‘현장판 페어 프로그래밍’ 같은 멋진 혁신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기술이 소외된 현장으로 달려가 그들에게 새로운 무기를 쥐여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내 생각을 잠시 멈추게 하는 질문이 있었다.
내 지인 중에 크지 않은 규모로 농사를 짓는 분이 있다.
어느 날 그분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농사를 지을 때 AI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나는 순간 멈칫했다.
머릿속에는 여러 기술적인 답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들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분의 일상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분의 하루는 모니터 화면이 아니라 흙에서 시작된다.
날씨 하나에 농사의 결과가 달라지고, 손길이 한 번 더 가느냐에 따라 작물의 품질이 달라진다.
그 정직한 노동의 풍경을 떠올리자 내가 늘 말해오던 ‘효율’이나 ‘생산성’ 같은 단어들이 어쩐지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물론 농사에도 AI를 활용할 수 있다.
병충해를 사진으로 분석하는 기술,
기상 데이터를 활용한 농사 계획,
스마트팜 같은 자동화 시스템.
하지만 그런 기술은 대부분 큰 시설과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현실적인 선택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또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그 쉬운 말을 하지 못했을까?”
"왜 내 머릿속에서 ‘농촌’과 ‘AI’를 연결하려면 수억 원대 시설이나 복잡한 데이터 시스템 같은
거창한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지레짐작하고 있었을까.."
평소 강의실에서는
“거창한 목표보다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활용부터 시작하라”고 그렇게 강조해 놓고
왜 그분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디지털’과 ‘농촌’ 사이에 높은 벽을 세우고 있었을까.
돌이켜보니 내 안에도 단단한 고정관념이 있었다.
AI는 차가운 모니터 속의 영역이고 농사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영역이라는 이분법.
흙 묻은 손으로 스마트폰을 터치하는 그 단순한 장면조차
내 머릿속에서는
'데이터가 없어서 안 될 거야.'
'현장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
라며 스스로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좋았다.
“복잡한 정부 보조금 신청서를 사진 찍어 읽기 쉽게 요약해 달라고 하세요.”
“오늘 한 일을 말로 기록하면 AI가 깔끔하게 농사일기로 정리해 줄 겁니다.”
“병충해가 의심될 때 농약방에 가기 전 AI에게 먼저 사진을 보여줘도 좋습니다.”
이런 소소한 시작점들이 분명 있었는데
나는 왜 그 쉬운 말조차 건네지 못했을까.
나는 AI의 기술이 아직은 농업 현장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농촌을 바라보는 나의 좁은 시선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그분께 드리지 못한 대답을 다시 정리해본다.
거창한 시스템이 없어도 괜찮다.
큰돈이 들지 않아도 좋다.
스마트폰 하나로 농부의 수고를 단 10분이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그토록 말해왔던 ‘지식의 유틸리티’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