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의 아이콘

난임의 기록 첫 번째

by 한여름의소아과






나는 습관성 유산이었다. 결혼하고 아기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난임은 먼 나라 이야기, 유산은 드라마 속 이야기였다. 임신은 피임 없으면 바로 되는 줄 알았고 10개월 동안 애를 품으며 하던 일 하면 10개월 뒤에 아이가 출생하는 줄 알았던 나에게 잠시 머물다 간 아기들은 다섯 손가락을 넘어간다. 첫 번째 아기는 태몽이 까만 쥐였다. 너무 작아서였을까, 그 아이는 심장소리도 들려주지도 않고 그렇게 멈췄다. 산부인과 의사는 첫 번째 임신이라는 내 말에, 원래 첫 임신에 유산은 너무 흔한 일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통계학적으로 20%가 자연유산을 경험한다며 유산 후 아이가 더 잘 들어서니 힘내라 해주었다. 파워 J였던 내 친구, 계획에 맞게 임신을 하고 계획에 맞게 출산휴가를 쓰고, 심지어 첫째 육아휴직이 끝날 때쯤 둘째를 임신하고 그렇게 쭈욱 육아휴직을 텀 없이 연달아 썼던 내 친구는, 임신 기간 내내 이벤트라고는 없던 내 친구는, 애 들어서는 것 확인된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이냐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쨌든 너는 애 생기는 거잖아. 참 쌉티같은 친구의 말에 웃었다.


하지만 밤에 와서 집에 혼자 있으면 계속 눈물이 났다. 까만 귀여운 쥐였던 그 아기에게 편지도 썼다. 점점 진해지는 임테기를 붙이고 그 밑에 뭐라 뭐라 썼다. 호르몬의 영향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감정적인 사람은 아닌데, 울면서 그렇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비교적 일상에 빨리 복귀했다. 남편과 나는 본격적으로 몸관리에 들어갔다. 남편은 술과 담배를 끊었으며 엽산을 챙겨 먹고, 영양제를 챙겨 먹었다. 둘 다 운동을 시작했다. 유산 후 3개월 뒤에 다시 임신을 시도하라 했다. 3개월 뒤 나는 두 번째 임테기 두줄을 확인했다. 남편도 나도 기뻤다. 임테기는 점점 선명해졌고, 난황도 반짝반짝 빛났으며, 6주 차 힘차게 뛰는 심장소리도 확인했다. 모든 것이 교과서대로 진행하고 있었다. 6주부터 나는 지독한 입덧을 시작했다. 입에서 쓴맛이 돌고 침조차 삼키기 어려웠다. 모든 음식의 맛이 미묘하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번 임신은 뭔가 느낌이 다르다 싶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직장에는 밝히지 않았다. 그때 모성법이 강화되면서 임산부 보호가 강화되면서 임신 사실을 알리는 순간부터 동료들에게 내 일이 몰리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임신 12주 이상은 되어야 알리는 게 암묵적 룰이었다. 동료들에게 미움받기 싫었던 나는 임신 사실을 숨긴 채 직장을 다녔다. 직장에서 큰일이 터져서 야간 당직을 서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날 당직자는 나였다. 유독 일이 많은 밤이었다. 밤샘 근무를 마치고 그다음 일과까지 마무리하고 집에 갔는데, 밤을 새우고 와서 먹는 아침인지 아주 잘 들어갔다. 컨디션이 급격하게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때가 8주에서 9주 즈음이었다. 입덧이 일찍 끝나나? 그때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 후 며칠 뒤 정기검진이 있어서 산부인과에 내원했다. 첫 번째 유산을 진단해 주었던 의사 선생님은 여장부 스타일이었다. 시원시원하고 거침이 없는. 그런데 그분이 어? 이상하다 하면서 초음파를 다시 보시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된 거다. 뭔가 이쁜 하리보 젤리 같아야 할 초음파 곰돌이는 어딘가 찌그러져 보였으며 심장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심정지로 유산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심장이 멈춘 지는 2-3일 된 거 같다고 하셨다. 왠지 그날 야간 당직 때문에 유산된 것만 같았다. 그 시원시원하신 선생님이, 첫 번째 유산 진단 시에는 참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던 분이 표정이 굳어지시더니 진단기준에는 맞지 않지만 너무 단기간에 연속적으로 2번 유산이어서 진료의뢰서를 써줄 테니 큰 병원 가보라고 하셨다. 진료실에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진료의뢰서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대로 병원을 나갈 수 없어서 1층을 누르지 못했다. 대신 층별 안내에서 옥상공원을 발견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햇빛은 눈부셨다. 바람은 상쾌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닥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서 있었던 것 같다. 겨우 생각나는 것이 남편이었다. 남편에게 전화로 알렸다. 남편의 반응은 생각나지 않는다. 남편도 나만큼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할 수가 없었다. 그냥 둘 다 각자의 슬픔과 충격이 너무 컸다.


첫 번째 유산 때 유산휴가를 썼었다. 그때 많은 위로를 들었는데, 대부분 원래 잘못된 아이였을 거다. 유전자 기형. 자연도태된 거니 맘 쓰지 마라 라는 위로를 들었는데, 그 말이 그대로 다시 화살이 되어서 박혔다. 유전자 검사를 할 거다. 진료의뢰서를 손에 쥐고 바로 대학병원 외래를 잡았다. 진료실에서 산부인과 교수님은 차갑게 말했다. 검사할 필요 없어요. 2번 유산이라서 진단기준에도 안 맞아요. 직장 내 스트레스도 심한 직종 같은데 소파술 예약 잡고 가세요.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유산은 소파술로 마무리되었다. 소파술 예약 잡고 유산휴가를 써야 하는데, 불과 3개월 전에 썼는데 차마 인사담당자에게 또 유산을 해서 유산휴가를 쓰겠다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소파술을 받고 바로 그냥 다시 직장에 복귀하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했다. 쪽팔림을 이기는 것은 유산 후 몸 관리 잘못하면 자궁유착, 불임을 유발할 수 있고 아기가 계속 흘러내리는 습관성 유산으로 갈 수 있다는 말에 불안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인사담당자에게 사실을 알리기 위해 30분 동안 심적갈등 끝에 전화를 걸고 차마 말을 떼지 못해서 뜸을 한몇 분쯤 들이고 띄엄띄엄 말하기 시작해서 마지막엔 거의 울음에 말이 먹히는 상태로 전화를 끊었다. 우린 전혀 그럴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날 어떻게 생각했을까?


유산휴가가 끝나고 나서 다시 직장에 복귀하면서 휴대폰을 켰을 때 수많은 위로의 카톡들이 있었고 차마 내 아픔을 다 헤아리지 못해 어떤 말을 해야 되는지 모르는 난감한 카톡들도 있었다. 직장 복귀 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로해 주었고, 나는 우리 직장 내 유산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얘기해 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도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며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을 보며 고마움을 느꼈다. 난임병원을 소개해준 분도 있었다. [난자채취를 기가 막히게 하더라고] 전혀 나에게 사적인 경험을 얘기해 줄 것 같지 않은 이들도 자신의 아픔을 말해주는 모습을 보며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그들의 눈에 내가 불쌍하게 보이는구나 싶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밝은 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농담처럼 내가 이러다 저 유산의 아이콘이 되겠어요, 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최대한 가볍게 넘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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