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의 기록, 2번째
직장에서 나는 밝아 보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점점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기분전환하기 위해 방문한 뷰가 좋았던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남편 친구 부부는, 출산 전 마지막 만찬으로 식사하러 왔다고 했다. 순산하세요 하고 웃으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다른 테이블에서 우리는 말없이 식사를 했다. 나는 그때의 그 산모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를 않는다. 왜냐면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고 그 행복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거였다. 어쩌면 난 평생 모를 수도 있다. 그 당시 나는 길가는 임산부만 봐도 눈물이 났다. 나에게는 저런 행복이 영원히 허락될 것 같지 않은 느낌. 그 느낌은 점점 강해져서 이제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부부만 봐도 눈물이 나고, 아기띠만 하고 있는 부부만 봐도 눈물이 났다. 그들에게 허락된 행복이 영원히 나에게 허락될 것 같지 않다는 예기불안은 강해졌다. 나는 점점 어두워졌고 삐뚤어졌다.
나는 피해의식이 생겼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고, 나를 제일 신경 써야 된다 생각했다.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갔다. 영양제에 한약까지 챙겨 먹었으며, 쑥즙, 양배추즙을 챙겨 먹기 시작했다. 그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유산 후 다시 임신 시도는 3개월 이후부터다. 3개월 동안 난 유난을 떨기 시작했다. 생리혈의 색깔이 검은지 선홍빛인지, 덩어리 졌는지 이런 것 하나하나에 모두 민감하게 반응했다. 원래 딱히 스타일이 있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 차림새는 점점 더 촌스러워졌다. 발목양말 두꺼운 것과 운동화를 신었으며 기모바지를 입고 히트텍에 스웨터를 입고 거기다가 패딩을 입었다. 한겨울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에 모든 것에 포커싱 되어있었다. 한의를 믿지 않았던 나는 혈에 민감해졌고, 체질에 집착했다. 잘 때는 복대를 하고 잤다. 자궁이 따뜻해지기를 바라면서. 한의를 정말 믿지 않았는데 몸이 따뜻해지니 혈색이 좋아졌다.
남편은 유산 후 나랑 다른 동굴에 들어갔다. 그는 매우 우울해했다. 말이 거의 없어졌다. 나는 이해를 전혀 할 수 없었다. 나는 몸 상해가며 소파술을 2번이나 거치면서 유산한 건 난데 남편이 뭘 했다고 나를 본체만체하며 저 사람은 동굴에 처박혀 있지? 나의 동굴로 와서 나를 위로해주지 않지? 내가 다음 임신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이걸 왜 남일처럼 관망만 하지? 나랑 왜 같이 으쌰으쌰 하지 않지? 자기는 왜 자료나 논문을 더 찾아보지 않지? 나만! 왜 나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늘 양말을 챙겨신었고, 목에 손수건을 두르고 다녔다. 무협지도 아닌데 찬 기운이 몸에 느껴지는걸 극도로 싫어했다. 어느 날 내가 한약을 데워 먹는데 남편이 집에 들어와서 집이 왜 이렇게 후끈하냐며, 온 집에 한약냄새라며 창문을 열었다. 창문과 함께 훅 들어온 찬 바람에 내 머리에 퓨즈가 나갔다.
나는 2번 연속 유산 후 검사를 하지 않았다. 전문가의 의견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검사를 했어야 했었다. 검사를 하지 않아 원인을 모르겠으니 모든 것에 원인을 찾고 있었다. 폰을 충전기에 꼽아놓고 장시간 해서 전자파의 영향인가? 내가 혈액순환이 안돼서 얇은 아이와 나의 연결고리인 탯줄의 혈관에 혈전이 콱 막혔나, 긴장 잘하고 소심한 내 성격 때문에 혈관이 수축되면서 탯줄의 혈관까지 수축되어 작은 배아의 숨줄을 끊었나, 내가 자가면역질환이 있어서 내 항체가 아이를 공격했나. 수많은 가설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고 모든 변수를 차단하고 싶었다. 폰도 바꿨고, 몸을 따뜻하게 했고, 호흡법을 익히면서 온몸을 이완하는 법을 배웠고, 골반순환을 촉진시키기 위해 골반교정 필라테스를 다니기 시작했다. 코로나 전이었는데 감기에 걸릴까 봐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뭐를 조심해야 될지 몰라서, 모든 걸 조심하기 시작했다. 예민했다.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
평소였으면 찬바람 싫어. 하고 창문을 닫고 끝날 일이었을 텐데, 나는 비뚤어져있었고 불만에 가득 차 있었으며 예민했다. 나는 남편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이기적이고 나에 대한 걱정과 염려는 하나도 없으며 아픔은 오직 나만의 것이고, 다음 임신을 위한 노력도 오직 나만 하고 있고, 직장에서 유산했다고 온 동네 소문난 나와 다르게 너는 직장에 말도 하지 않아서 너만 아무렇지 않으면 유산은 마치 없던 일 아니냐, 평소에 다른 것 없이 직장만 다니면서 집에서는 폰만 보고 니 일상은 그대로니 뭐 상관없다는 거냐, 방관자로 몰아붙였다. 아이는 나만 가지냐, 이럴 거면 다 그만두자. 남편은 감정의 업다운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잔잔한 호수 같은 사람이라 보통 남편은 화가 너무 나거나 내가 부르르 끓어오르면 미안하다는 말로 일단 상황을 진정시키거나, 자리를 피하는데 그날의 남편은 처음 보는 일그러진 표정이 점점 얼굴에 떠오르더니 얼굴색은 시뻘게지며 나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의 큰 소리를 그때 처음 들었다. 너만 슬프냐고. 자기도 아기를 잃었는데 너만 슬프냐고 내 슬픔은 보이지 않냐고 소리 질렀다. 나는 나대로 극복하고 일상을 유지하려고 죽을 만큼 애쓰고 있다. 내 슬픔을 너에게 어떻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지 않느냐. 나도 힘들다. 남편은 소리를 지르고 집을 나가버렸다. 남편이 나보다 더 슬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나한테 저러지? 아 이러니까 이혼을 하는구나. 우리는 끝이구나. 저 사람이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 맞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미워서, 쏘아붙일 말이 계속 생각이 나고, 사과를 받고 싶어서 전화를 계속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자정이 되었다. 어두운 침대 모퉁이에 앉아 생각했다. 사실 초기유산은 배아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산부인과 의사조차도 너무 초기 유산은 흔한일이여서요. 라고 말씀하셨다. 나조차도 첫 번째 유산에 초음파사진과 임테기를 붙이며 편지를 쓰며 줄줄 울었던 일이 호르몬 과잉으로 인한 감정과잉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았던가. 연속적으로 두 번의 유산을 겪으며 다음 임신에 대한 준비로만 가득 찼지, 남편의 슬픔은 생각하지 못했다. 무기력해 보인 남편의 모습은 정말 상실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우울증 환자가 무기력한 것처럼. 그런 사람에게 내가 왜 힘을 안내냐! 다그친 건 아닐까. 슬픔은 각자의 색깔이 있는데 내가 오히려 남편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남편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의 끝은 생각의 끝을 물고 늘어졌다. 오랜 시험관 시도 끝에 결국 부부가 이혼했는 케이스가 생각났다. 서로 이 과정에 지쳐서요. 씁쓸하게 말하던 지인이 생각났다. 물론 나는 그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결혼 전이었다. 그녀는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으나 수많은 시험관 시도 끝에 체중이 10kg 이상 늘었다고 했다. 아이를 참 좋아하던 너무 선하디 선한 사람이었다. 나는 남편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상황이 계속 유지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정이 떨어지리라. 서로 같이 있는 것이 지옥이 되리라. 그러나 화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정말 너랑 끝이라고 문자를 보내고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새벽 4시가 넘어갈 무렵에는, 나는 이제 남편이 어디서 죽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는 지경이 되었다. 실종신고를 해야 하나 싶을 때 돌아온 남편은 찬바람을 그대로 맞았는지 온몸이 얼음장 같았다. 남편은 첫 번째 임신에도 두 번째 임신에도, 딸일까 아들일까, 아기방은 어디로 할까, 고민을 했다고 했다. 아기 신발이 그렇게 작은지 자기는 처음 알았다고 했다. 아침에 공원을 뛰면 내년에 여기에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할 생각에 아침부터 설렜다고 했다. 정말 우리에게 아기가 있었다가 없어진 것 같다고, 내가 너무 기대한 것만 같다고. 우리는 엉엉 같이 울었다. 유산된 두 아기는 교과서에조차도 태아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아로 정의되는 존재였다. 엄밀히 말하면 세포덩어리로 정의된 존재들이었다. 그 존재를 잃었다고 세상에 미친 듯이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나와 남편 단 둘 뿐이었다. 나는 울고 있는 남편을 안아주었다. 상실에 미쳐있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만약에 애 없어도 둘이 행복하게 살자. 그게 우리 운명이면 받아들이자.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우린 그렇게 위로를 했다. 하지만 말뿐 아이는 그렇게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