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과 의사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아이는 대부분 죽었다. 전공의 1년 차를 마치면서 알았다. 응급실에 교통사고로 왔던 6시간 동안 심폐소생술을 했던 A. 대부분 ‘누구 아기’로 불리던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오랜 기간 입원으로 유독 이름이 있었던 B. 이름이 없었다가 사망진단서를 작성할 때 이름이 생겼던 C. 급격하게 악화되어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지 차트를 무수히 리뷰하며 이름이 외워졌던 D. 뇌사상태로 한 달 동안 4시간마다 I/O 노티를 받으며 이름을 들었던 E. 수련을 하면 할수록 내가 이름을 기억하면 그 아이는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트라우마처럼 남아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환자에 대해 얘기할 때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sepsis로 입원한 몇 개월 환아, status로 입원한 몇 세 환아, AML로 입원한 환아. 오로지 진단명과 나이로만 얘기했다. 이름을 말하면 안 되는 징크스 같았다. 나중에 이건 징크스를 넘어 강박이 되었다. 내가 그 아이 이름을 부르면 그 아이는 내 마음속에 아끼는 꽃이 되어 신께서 눈여겨보시고 가져가버릴 것만 같았다. VIP 신드롬 같았다. 잘하고자 하면 더 잘 안 되는. 나는 대학에 있는 동안 내내 불안에 시달렸다.
소아과는 특수하다. 대부분의 과는 환자가 죽는다고 병동 전체가 슬픔에 잠기지 않는다. 오랜 기간 항암을 진행하다 사망한 아이가 있었다. 늦은 밤 시작해 자정이 넘어가자마자 끝나는 형식적인 2일장에 병동간호사들 중 액팅 막내라인 일부가 조문을 갔다. 엄밀히 말하면 근무지 이탈이다. 그러나 우리는 암묵적으로 용인했다. 차지급이 대신 액팅을 해주었다. 그 아이를 항상 우리 누구 찡이라 불렀던 태생이 소아과의사였던 내 동기는 오프임에도 소식을 듣고 복귀해 장례식장에서 오열했다. 나는 장례식장에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건물 뒤 편에서 흙바닥만 팠다. 나의 윗년차는 장례식장이 내려다보이는 복도창문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환자가 죽으면 의료진도 데미지를 입는다. 누구는 그걸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누구는 처박혀 차트를 강박적으로 리뷰하고, 누구는 애써 평온한 척하며 방어기제를 드러낸다. 아이를 잃은 보호자가 절망으로 무너지듯, 그 아이를 살리지 못해 잃어버린 의사도 자책감과 무력감으로 무너진다. 부모가 자식을 잃은 슬픔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아이를 잃는 것은 우리 모두다. 상실로 인한 비극의 다른 면일 뿐이다.
부모가 아이의 죽음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5단계로 거치는 동안 분노가 의사와 병원에게 향하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회가 그 분노를 더 강화시키며 환자를 살리려 했던 의사의 의도와 고군분투했던 상황과 맥락은 모두 사라지고 하나의 이벤트, 몇 분 간격의 동선, 몇 글자의 기록, 몇 초의 판단을 추궁하며, 설명을 해도 충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부전문의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어디서든 이유를 찾아 비난을 계속한다. 그렇게 아이의 죽음은 모두의 상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과실로만 남는다. 온 사회가 그 상처를 더 갈기갈기 벌려서 소금을 쑤셔넣고 내장을 꺼내 보호자에게 들이밀며 위로가 되냐고 묻는다. 괴기하다.
부모만큼 그 아이가 살았으면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부모로부터 살인에 대한 형사고소와 십수억의 민사소송. 공권력으로부터의 죄인 취급. 죽음을 반드시 누군가의 책임으로 귀결시켜 정의의 이름으로 파멸시켜야 하는 사회의 자동전제가, 의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시키는지 보았다. 잔인한 일이었다. 이게 지옥이지,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환자를 떠나보낸 적 없는 사람들이, 이 감정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책상 위에서 의료를 정의하고 처벌을 논하면서 만들어낸 지옥이다.
변호사는 의료소송을 통해 수임료를 얻고, 판사는 잘 알지 못하면서 의료의 권위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판결을 내려 자신의 권위를 세운다. 그들은 잃을 게 없다. 그러나 보호자와 의사는 다르다. 의사는 죽음을 다루는 게 업인데, 담당환자가 죽을 때마다 업을 통해 번 노동소득을 잃고 업을 잃는 위기에 처한다. 의료소송에게 이긴 보호자에게는 보상이라도 남지만 패소한 보호자는 아이도 잃고, 비용을 잃고, 그동안 자신의 삶도 잃는다. 돈을 떠나 이긴 보호자도, 패소한 보호자도 당연히 응당 거쳐야 할 정상 애도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그때 그 죽음에 멈춰있다. 이기든 지든 공허함과 상실감과 극복되지 않은 슬픔이 남는다. 그러면 당연히 그다음 단계는 우울장애다. 상실을 건강하게 극복하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올 기회를 잃어버린다.
의료소송의 패소율은 높다. 의사가 유리해서가 아니다. 성형, 비만수술 같은 선택적 의료가 아닌 필수의료에서는 의료적 개입이 없었다면 상태가 더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의사는 그 과정에서 될 수 있는 한 무엇이라도 해보려 했던 사람이다. 완벽하지 않았을 수는 있다. 보호자에게는 크게 느껴지는 과실이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결과를 결정짓는 핵심이 아닌 경우도 많다. 그 선택이 없었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애초에 소송으로 가지 않아도 될 일이 소송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 결국 의료소송은 의사와 보호자 모두에게 치유의 과정이 아니라 파멸의 과정이다.
법은 결과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의료는 과정 속에서 결정을 내린다. 법정에서는 사후에 모든 정보가 한 자리에 놓이고 결과가 정해져 있지만, 진료실과 병동에서의 판단은 언제나 불완전한 정보 위에서 이루어진다. 의료소송이 대부분이 의사에게 강한 반감을 일으키는 이유다. 억울하다. 하지만 사람이 죽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산자는 죽은 자 앞에서는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죄인이다. 억울하다 말할 수 없고 억울하다 말하는 순간 날아오는 건 사람을 죽여놓고라는 돌팔매질이다.
응급실 뺑뺑이는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의사수가 모잘라서가 아니다. 죽음이 과실로 연결되는 현 괴기한 구조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으면 환자를 받지 않게 시스템이 형성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법원을 통해 사소한 팩트가 중대한 과실이 되는 판례가 쌓일수록 필수의료의 의사와 병원들이 점점 완벽주의자가 되어간다. 완벽주의자는 완벽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시도도 용납하지 못하고, 실패도 용납하지 못하고, 죽음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가 응급실 뺑뺑이를 초래한다.
30억짜리 수술로봇이 있다고 다수의 병원들이 광고하는, 반나절이면 이동이 가능한 2025년 한국에서 경련으로 병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이가 사망했다. 아티반 한 앰플 한번 투여받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유는 소아신경세부전문의가 없어서다. 그 아이를 병원에 접수시키는 순간, 아이가 사망했을 경우 법원에서는 소아신경세부전문의 유무를 중대과실로 판단할 가능겅이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판례와 정책에 따라 움직인다. 의사들 사이에 교과서보다 더 중요한 건 심평원 의학, 최신 가이드라인보다 중요한 건 대법원가이드라인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를 잃은 가족이 빨리 사회적으로 복귀하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이 공동체의 역할인데, 어느 순간 공동체가 부모 마음에 불신의 씨앗을 심는다. 의학은 죽음으로부터 맞서 싸우고 그 과정에서 배우는 학문인데 언제부터인가 의학이 죽음을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내가 꿈꾸던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이런 게 아니었다.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