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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드림 Oct 25. 2023

사랑이 어떻게 호르몬을 이기겠니?

#1. 사랑이 어떻게 호르몬을 이기겠니?




그러니까 어느 겨울이었다. 


(전)남자친구와 늘상 하던 그런 통화를 하고 있던 날 저녁이었다. 

그는 퇴근 후에 미용실에 간다고 했는데 목소리가 썩 좋지 않았다. 

무슨일이 있느냐고 물어도 "별일 아냐. 그냥 요즘 생각이 복잡하네" 정도의 답이 돌아왔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분위기를 바꾸고자, 이번 주말에 만나서 뭘 하며 놀지 가볍게 질문을 던지는 내게 그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이번 주는 좀 쉬자"


좀 쉬자? 

나를 만나는게 일처럼 느껴지나 싶어서, 몇초간 입을 닫았다.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할 말이 없었거든. 

일단 미용실을 잘 다녀오라고 하고 우두커니 방에 앉았다. 


그렇다. 요즘들어 우리의 만남이 형식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느끼고 있었지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그 관계가 잘 봉합되리라고 병신 같이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처음과 같을 수는 없겠지. 도파민이라는건 그 유효기간이 3개월 정도라 했던가. 

사랑이 어떻게 호르몬을 이기겠나. 절대 불가능하지. 



잠들기 전 통화에도 그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시간을 좀 갖고 싶어. 이번 주는 각자 쉬고, 다음 주에 보자"

"나 다음 주에 출장가. 잊었어?"

"그럼 2주 정도 쉬고 그 다음 주에 보면 되지"


전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개새..아니, 회피형 인간인가. 

그 새끼가 회피형이든 아니든 애써 쿨한척을 해야했다. 



그로부터 2주 동안 우리는 서로 누구도 먼저 전화든 카톡이든 하지 않은채로 시간을 보냈다. 

나에게는 지옥같은 날들이었는데, 그는 그저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하루도 빠짐 없이 보고 있는채로. 

그저 아직 헤어지지 않은 남자친구의 도리를 그 정도로 하는 것 같은 채로. 

내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걸 짐짓 구경이라도 하는 것 처럼. 


그 시간 동안 나는 더 잘 살아야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밝게 스토리를 올리고, 운동 인증샷을 찍으면서 잘 지내는 척 했다. 

사람들을 만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늘 그렇듯이 여가를 즐겼다. 그게 독이 될지 득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회피형 인간에게는 그렇게 해야된다고, 하던대로 밝게 지내라고 하는 얘기들을 믿었다. 


2주의 시간 동안 담배는 늘었고, 살은 빠졌다. 

잠을 못잤고 밥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우리나라에 연애 심리 상담 업체가 그렇게 많다는 걸 태어나서 처음 알게됐고,

연애 유튜버들의 영상을 정주행하며 스스로 희망고문을 하고 있었다. 

정신이 피폐해졌다. 


'이러다 헤어지면 어떡하지?'

'헤어질 사람이었으면 벌써 얘기를 했겠지'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하면서 스스로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렇게 내다 버렸다. 

뭘 하고 살았는지 또렷이 기억 나지만, 또 아득하게 느껴지는 하루하루를 그렇게 버텼다. 


정말 잔인하디 잔인한 늦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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