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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드림 Nov 13. 2023

내 연애는 한도가 정해진 신용카드 같았다.

#4. 내 연애는 한도가 정해진 신용카드 같았다. 


그날의 이별은 후유증이 길지 않았다. 


'창창하게 젊고, 온 몸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나이에, 잘생겼지 키도 크지, 힘까지 좋아보이는 그 아이가 나 하나로 만족할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며 '쿨하게' 보내줬다. 남다르게 사랑했던 사이도, 죽을만큼 애틋한 감정도 없었다. 20대 초반, 나보다 나이도 어린 모델이 "누나, 누나"하며 좋다고 따라다니니까 그냥 만났다. 


누구든 내가 한 순간에 싫어져서 떠나도 그만이었던 자만심이 있었다. 연애를 시작할 때면 늘 그랬다. "어느 순간 내가 지겹거나,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생겼거나, 이제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어지면 우리 바로 헤어지자. 잡지 않을테니 거짓말은 하지마라." 그렇게 내 연애는 시작하면서부터 사용한도가 정해져있는 카드 같았다. 어느 정도 쓰고 나면 다른 카드로 바꿔써야 한다던가, 아니면 선결제를 해서 연명하는 그런 유한한 애정이었다. 어느 가수의 한도 없는 블랙 카드 같은게 아니라, 이렇게 쓰다보면 한도에 금방 다다르겠지 하며 예정에 놓고 쓰는 일반인의 신용카드. 


자만감이 하늘을 지르던 20대. 이미 한도를 알고 쓰는 애정은 그것이 다 닳는다고 해도 아쉽지가 않았다. 적당한 때가 되면 나도 쉽게 안녕을 고했다. 누가 먼저 '질렀든', '질렸든'. 그 이별에 아쉬움이 없었다. '조금만 더'가 존재하지 않는 사랑이기도 했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바람을 피웠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었지만 좀 분노했었다. '그래..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세살이나 많은 나보다는 너랑 동갑인 풋풋한 10대가 낫겠지'하며 나는 또 그 이별을 합리화 시켰고 다음 연애를 빠르게 시작하며 배신감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 따위에 깊은 감정을 두지 않았던 내가 내 자만심에 내 발등을 찍었다 싶었던 사람을 20대가 저물며 만났다. 그는 자유분방했고, 구속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다른 이들처럼 내가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어주지 않았다. 잡힐듯 잡히지 않는 노련함이 좋아서 상처 받을 것을 알면서 시작했다. 그 피로도가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개를 받기로 한 날 서로 다른 일정이 생겨서 못 만나고, 예정에 없던 날에 그가 갑자기 차나 한잔 하자며 집 앞 카페로 왔다. 급만남에 제대로 꾸미지도 못하고 30분만 기다려라 하는 내게 '천천히 빨리' 오라고 주문하며 그가 말했다. 


"학동역 커피빈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천천히 빨리와. 여기 커피도 있고, 나도 있다"


나도 있다. 


그날 이상하게 그 말에 꽂혔다. 

아, 거기에 가면 네가 있겠구나.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겠구나. 

누군가가 나를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겠구나. 


이상하게 그 말에 꽂혀서 카페에서 포차로 포차에서 집으로 함께 향했던 그 밤. 


그 계절의 향기와 내가 입고 있던 옷, 신고 있었던 신발과 걸었던 거리들을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스물 여덟의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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