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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재원 Apr 29. 2024

어른이 된다는 건

 "일하는 건 항상 X 같아." 슬쩍 회식 자리를 빠져나올 려는 찰나에 다시 눈을 감고 몸을 비스듬히 벽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K의 행복론이 이어졌다. 본인은 일과 나머지 일상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고, 일하는 건 X 같지만, 나머지 삶이 충분히 행복해서 만족한다는... 대략 그런 이야기였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술 한잔 걸치고 충분히 얘기할 수 있는 주제인데 마음이 어지러워져 갔다. 이럴 때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단련된 나만의 루틴이 있다. 일단 무심한 표정(절대 표정이 굳어서는 안 된다)으로 핸드폰이나 티비 화면을 응시하고 이야기가 다른 화제로 넘어가는 틈을 살펴 바깥바람을 쐬러 나간다. 더구나 오늘은 4년 만에 처음 뽑은 신입사원 환영회 날... 내 마음을 단속, 또 단속해야 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기껏 술자리 말 한마디인데 툭툭 털어내고 하루를 시작하면 좋으련만 각성된 정신을 가눌 때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안양천을 찾아서 오랜 시간 걸었다. 팽팽하게 매듭지어진 마음의 끈을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가는 나만의 또 다른 루틴이다.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그동안 너무 잘해줬나.' 꼰대 같은 생각부터 십 수년을 함께 일해온 동료 직원에 대한 서운함에 약간의 모멸감까지... 너무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혼재되어 밀려 들어왔다. 아버지 가업을 이어서 사업을 해 온 지 18년.. 그러니까 K와의 인연도 어느덧 17년. 항상 자신만만하고 거침없는 성격이라 나와 결이 다르다는 건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동안 누구보다 뚜렷한 성과를 내왔고 그만큼 대우해 주고자 신경을 썼다.(이건 순전히 내 입장이지, 그 친구 속 마음을 내가 어찌 헤아리리..) 돌이켜 보면  이런 종류의 서걱거림이 그 간 몇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이만한 친구를 구하기 쉽지 않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부터 옹졸해 보이고 싶지 않다는 치기 어린 마음, 그리고 갈 수 있는 데까지는 최대한 함께 가고픈 개인적인 바람까지 혼재되어 유야무야 넘어갔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번만큼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휴일이 지나고 업무에 복귀한 날, K가 종이 한 장을 들고 먼저 내 방(회의실)을 찾았다. 새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미팅을 마치려는 수순에 K에게 말을 꺼냈다. 앞으로 공식 회식 자리에서, 적어도 내가 함께 한 모임에서 그런 말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한 방 먹은 듯한, 당황한 그의 눈빛이 전해졌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최대한 짧고 담백하게 얘기하려 했던 내 계획이 무산되었다. 이미 말을 뱉어 버렸으니 주워 담을 수는 없고... 결국 그가 했던 말을 내가 다시 친절하게(?) 인용해서 상기시켜 주어야 했다. K는 그제야 기억이 난다는 듯 "죄송합니다." 답했고 나도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었다. 불편한 마음에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그런 말 들으면 나 상처받아."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자리를 떴다.


 사무실 밖을 나섰다. 따뜻한 햇살 아래 벚꽃비를 맞으면서 또 한참을 걸었다. 원만하게 일을 마무리했다는 안도감,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유리 멘털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안쓰러움, 시나리오와는 달리 구질구질하게 설명하는 나와 군더더기 하나 없는 K의 깔끔한 사과까지... 또다시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이전 같으면 눈물이 차 올랐는데 이번에는 눈시울이 약간 붉어지는 선에서 다스려졌다. "더 이상의 자기 연민은 이제 그만!" 을 외치는 순간 불현듯 수년 전 일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우울증 환자가 둘 있는데 하나는 우리 와이프고, 다른 하나는 팀장님이야." 느닷없는 J의 발언에 몽롱했던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날도 오랜만의 회식 자리였고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어색해질까 허허 웃고 말았다. 어김없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내 마음에 와서 박혔고, 그때부터 마음이 길을 잃을 때면 하염없이 걷는 습관이 생겼다. 1주일, 2주일... 시간이 지나면 무덤덤해 질만도 한데,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나는 실제로 불안, 강박에 우울까지 3종패키지를 겪고 있었고, J의 말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팩트였다. 아무리 내가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열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작은 공간은 점차 심상한 공기로 채워졌고, 결국 내가 이를 견디지 못하고 J에게 밥 한 끼 먹자고 했다.(두 달에 한번 회식을 제외하곤 난 늘 혼밥을 한다.)


 사천탕수육과 고량주 한 병을 앞에 두고 두 시간이 넘게 웃고 울었는데... 왜 그랬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도대체 왜 질질 짰을까?) 분명 우울증 환자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 내가 뭐라도 말을 했을 텐데(제발 그랬기를), 회사의 미래와 업무분장, 그리고 J의 속마음(이건 기억이 나야 하는데)까지 이야기가 끝없이 가지를 쳐서 그 발언에 대해 사과를 받았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술 한 병을 비울 때쯤에는 그간 우리를 둘러싼 불온한 기운도 희미해져 버렸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 자체가 민망했다. 술 냄새를 조금이라도 피하고자 편의점에서 가그린 한 병을 사서 둘이 나눠 마신 기억만 생생하다. 그 일 이후로 J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복원되었고 아침마다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있는 그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일 따름이다.


 그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한 뼘이라도 성장했을까? 적어도 이번에는 돌덩이를 혼자 끌어안고 스스로를 구덩텅이로 내몰지는 않았다. 이전처럼 상상의 나래를 펴고 고무줄 당기듯 시간만 끌어 쓰지는 않았다. 기왕 좀 더 쿨한 나였으면 좋겠지만 이 예민한 천성을 어찌하리... 이만하면 어른답게 행동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혹 도움 되는 내용이라도 있을까 유튜브 검색창에 '어른'이라는 키워드를 쳐보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세상과 날 맞추는 것... 나 어른이 돼 보면 그땐 알까? 모든 일이 지나갈 거란 것을... 나이가 들면 모든 게 이해가 될까?"







울라프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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