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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재원 May 06. 2024

선유로에서

 사실 이 길 정식 명칭이 선유로가 아닐 수도 있다. 선유도 공원으로 향하는 거리라서 내 마음대로 선유로라고 이름 붙였다. 월요일 저녁. 이곳은 참 고즈넉하다. 지하철 하나만 더 가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각종 프랜차이즈 샵이 널려 있는데 여기는 딴 세상이다. 물론 이곳도 먹고살아야 하는 만큼 밥집과 술집, 그리고 카페가 간간이 눈에 띄지만 요란스럽거나 빽빽하지는 않다. 인도는 넓고 일 차선 차도라서 한가롭게 거닐기 딱이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선유혼합음료"라는 상호명의 위스키바(bar)가 있다. 말총머리의,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의 남자분이 혼자 운영하시는 것 같은데 지나칠 때마다 힐끗힐끗 곁눈질만 했다. 큰맘 먹고 가게 문을 열었을 때 "안녕하세요?" 선이 고운 목소리와 과하지 않은 미소로 답해 주셔서 이후로 글을 쓸 때면 아지트로 삼고 있다. 지금 이 글도 재즈 음악 아래 에스프레소 마티니 한 잔을 마시며 여기서 쓰고 있다. 허세일수도, 소확행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아무렴 어떠랴. 세 아이와 씨름하는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안식을 찾는다.


 선유로 사거리 건너편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중견기업 사옥들이 적지 않게 자리 잡으면서 출근 시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쪽 지하철 출구로 빠져나온다. 지하철역 옆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 테이크 아웃 해서 총총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오전 9시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이곳도 적막함이 감돈다. 한 블록 안으로 옮기면 반경 30미터에 삼겹살 집이 세 개 포진해 있다. 그중 한 곳에서 며칠 전 아내와 저녁을 먹었다. 꽃 삼겹, 나비 삼겹... 붉은빛을 띤 고기 한 점 한 점 참 보기가 좋다. 고기 위에 새콤한 나물을 얹어 먹고 새로 한 잔을 마시니 이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같은 시간 건너편 삼겹살 집에서는 손님들이 돌솥판 위에 고기와 김치를 구워 먹는다. 지글지글 끓는 김치 냄새가 슬금슬금 침투하여 상큼한 나물 내음을 덮어버린다. 캡 모자를 쓴 초로의 꽃 삼겹살 집 사장님의 얼굴빛이 어두워 보인다. 어디 보자, 테이블 수가 하나, 둘... 열다섯. 예순은 넘어 보이시는 어르신 홀로 서빙을 하시고 주방 너머로 보이는 비슷한 연배의 아내 되시는 분과 둘이서 꾸려 가시는 것 같다. 내가 여기 꽃 삼겹살 사장이라면 김치삼겹살 냄새를 맡을 때마다 속에 열불이 날 것 같다. 근데 그건 돌솥삼겹살 집 사장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다. 무한경쟁과 살아남기 위한 차별화. 나비 모양의 고기 한 점과 돌솥 위에서 익어가는 김치삼겹살. 나 같은 손님은 둘 중 택일하면 되는 행복한 고민이지만 서로의 가게를 바라보는 두 사장님의 고뇌는 나날이 깊어만 간다.


 좌우 10미터 간격의 삼겹살 집 사이를 흐르는 긴장감을 지나서 왼쪽 모퉁이를 끼고돌면 주말 오후에 들르곤 하는 피맥집이 나온다. 내부 공간도 상당히 넓지만 이곳에 오는 이유는 따로 있다. 너른 마당과 피크닉 테이블, 그리고 10여 종의 생맥주. 날이 따뜻해서인지 내부는 텅 비어 있고 마당에만 사람들로 가득하다. 맥줏집이지만 유독 아이를 동반한 젊은 부부들이 눈에 띈다. 그래... 이렇게라도 숨 쉴 공간이 필요하지. 지난번에 들렀을 때 스텔라 한 잔을 서빙해주는 직원 한 분이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봤더라... 딸아이 축구 선생님이었다. 평일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과 공을 차고 라이딩하는데 주말 저녁이라고 그에게는 별 다를 바가 없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지만 그런 말이 지금도 유효할지 자신이 없다. 주말도 없이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게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 십 년 뒤, 이십 년 뒤에는 지금과는 다른 일상이 펼쳐질까? 맥주를 건네고 뒤돌아서는 청년의 뒷모습에서 삼겹살 집 사장님의 굽은 어깨가 언뜻 스쳐 지나간다.


 각자도생의 시대... 평화로워 보이기만 하는 선유로도 그런 조류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할 터. 마음이 길을 잃을 때마다 이곳에서 기운을 얻고 돌아가는 나로서는 매번 빚 진 기분이다. 부디 그들의 마음과 일상도 이곳 풍경만큼 넉넉하고 여유로울 수 있기를. 이곳 선유로만큼은 좀 더 천천히, 천천히 변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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