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려서 열병을 앓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 시절, 넉넉지 않았던 가정형편 때문에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했고 결국 소아마비 판정을 받았다. 굵은 나무 몸통 같은 오른쪽 다리로 세상 풍파를 버텨내는 동안 반대쪽 다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 마냥 위태로웠다. 십 년 전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는 아들 다리를 고쳐주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삼았다.
장애를 삶의 연료로 삼았던 것일까? 사람들은 무섭게 일을 추진하는 그를 탱크라고 불렀다. 첫 직장으로 제약회사에 다녔던 그는 공장 설비 중에 압축공기로 구동하는 펌프를 발견했다. 그때까지 펌프는 전기모터로만 작동한다는 통념이 지배적이었는데 공기를 사용하는 제품은 훨씬 저렴하고 사용하기 편리했으며 무엇보다 안전했다. 그는 곧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캘리포니아 그랜드테라스에 위치한 펌프 제조사를 찾더니 기어코 국내 대리점 총판 계약을 따냈다. 그리고 45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 당시 체결한 독점 계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30킬로가 넘는 제품을 손에 든 채 불편한 다리를 끌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고객사 방문을 했다는 사실은 이 업계에서 전설 같은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다. 물론 그의 뒤를 이어서 여러 경쟁사들이 유사한 제품을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시장은 레드오션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리스크를 최대한 피하려는 그의 신중한 성격 탓인지 업력에 비해 사업 규모 또한 민망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지난 40여 년간 수많은 회사들이 명멸하는 중에도 그의 회사는 명맥을 이어 왔다. 환율 변동에 따라 실적이 춤을 출 수밖에 없는 수입업의 태생적 한계에도 IMF 외환위기와 2000년대 후반 금융위기 때를 제외하면 적어도 적자를 낸 적은 없다.
"지금 오던지, 아니면 거기서 끝까지 승부를 보던지." 그의 메시지는 언제나처럼 간결했다. 달러값이 1,500원을 넘나들고 미리 맺은 단가계약으로 물건을 팔 때마다 손해를 봐야 했던 시기.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33층 사무실에서 목욕탕 타일을 쌓아놓은 듯한 3층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7년의 시간이 지났다. 배 부른 소리라는 걸 알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의 빅 픽처(Big Picture)에 내가 말려 든 건 아닐까? 수많은 밤을 짬뽕 한 그릇에 의지하여 버텨온 내 몸이 무럭무럭 불어나는 동안 사과와 채소를 주식으로 삼아 매일 헬스장을 다니는 그의 체중은 60킬로를 넘는 법이 없었다. 모니터에 머리를 처박은 채 하얀 눈이 구레나룻에 쌓이는 동안 듬성듬성 머리칼이 성길 지언정 그의 구레나룻은 깜장색 테이프를 붙여 놓은 듯 빛이 났다.
그는 회사를 재건할 전권을 나에게 주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찾아 중국으로 떠났다. 1년에 절반은 서울, 나머지 절반은 북경에 머물면서 스크린 골프장, 화장품 용기 제작, 자동차 부품 공급 등 이전과는 전혀 관련 없는 비즈니스를 줄기차게 이어갔다. 일흔이 넘는 지금까지도 연착을 밥 먹듯 하는 동방항공 이코노미석에 몸을 싣고 한국과 중국을 오가고 있다. 그는 천생 비즈니스 맨이고 사업장은 그에게 놀이터에 다름 아니다.
그에겐 한 가지 특이한 습관이 있다. 출근하면 방문을 반드시 잠근다는 것이다. 똑똑 그의 방에 들어가면 우선 매캐한 담배 연기를 감내해야 한다. 옷가지가 널브러진 캐리어와 양주가 담긴 쇼핑백 사이를 징검다리 건너야 비로소 이십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푹 꺼진 소파에 앉을 수 있다. 대각선 방향의 철제책상 옆에는 그의 몸집만 한 금고 하나가 맨 안 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은행에 갈 일이 있어서 그가 캐비닛을 여는 걸 힐끗 본 적이 있다. 법인인감과 통장, 그 외 몇 가지 서류들.. 그게 전부였다. 그 누구도 100% 신뢰하지 않는 것, 그가 지금까지 생존해 온 방식이었다.
한 번은 그와 라운딩을 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친 공은 어김없이 오른쪽으로 휘어서 수풀에서 공을 찾아 헤매는 동안, 카우보이 모자를 쓴 그는 100미터씩 또박또박 캐디가 가리킨 방향으로 공을 날렸다. 드라이버를 치든, 아이언을 치든 거리는 똑같았지만 방향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그의 인생 궤적을 보는 느낌이었다. 40여 년 만에 한 가지 새로운 사실도 발견했다. 카트를 타고 가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나에게 레슨 강의를 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쳐라, 넌 왜 그렇게 백스윙이 빠르냐, 벙커에서는 공을 치지 말고 바로 뒤 쪽 모래를 쳐야 한다... 그때 처음 알았다. 그가 그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인 줄은.
점심 무렵 새파란 외제차 한 대가 건물 정문 앞에 선다.(당연히 거기 세우면 안 된다.) 주문 제작한 구두를 신은 그의 왼발이 살짝 지면에 닿는다. 6년 전 새로 지은 5층 짜리 사옥에는 이전에 없던 엘리베이터가 있고 덕분에 그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인다. 더 이상 차디찬 계단 위에서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뚜벅뚜벅 3층 자동문이 열리고 십여 명 남짓 직원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그의 방으로 직행한다. 오후 네 시 그가 퇴근하기 전까지 그 문은 굳게 닫혀 있다.
40여 년을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함께 살아왔지만 내가 아는 그의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나의 무심함에 자수성가한 그의 폐쇄적인 성격이 더해져서일까? 그와 나 사이의 이야기는 대부분 존재하지 않았거나 이미 휘발되어 버렸다. 오늘은 또다시 중국으로 출장을 떠나는 날. 그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는다. 잘 다녀오시라는 말에 고개 한 번 끄덕이고 이내 굉음을 내며 그만의 안식처를 향해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