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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재원 May 28. 2024

 낙하산

 숨이 가빠온다.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는 바람 소리에 귀까지 얼얼하다. 한 명씩 순서에 맞춰 비틀비틀 줄을 선다. 내 앞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출구에 선다. 양쪽 손잡이를 움켜 잡고 눈을 질끈 감는다. 하나, 둘, 셋... 두 팔을 엑스 자로 모은 채 뛰어내린다. 검회색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지금 오든지, 아니면 거기서 끝까지 버티던지." 처음이자 마지막 제안은 아버지다웠다. 고민하는 척했지만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번 아웃과 당시에는 병명을 알지 못했던 불투명한 생각들,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퇴사를 결정했고 약간의 휴식기를 거쳐 아버지 회사에 입사했다.


 컴컴한 복도와 기름 냄새, 철제 책상과 흔들리는 형광등 불빛... 그곳의 풍경은 어린 시절 추억을 닮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곳은 더 이상 추억을 소환하는 대상이 아니라 매 순간 내가 살아가야 할 일상이 되었다는 것. 그때는 미처 몰랐다. 암울한 그 공간이 나에게 구원의 통로가 될 줄은.


 어렸을 적 뵈었던 분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책상 사이사이 높다란 칸막이를 치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더존 물류 시스템을 깔고 네이버와 구글 검색창에 우리 제품을 등록했다. 1500원을 오르내리던 달러값이 떨어지면 비축하고 김해와 군산에 지사를 세웠다. 그렇게 하나하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바꾸어갔다.


 물론 당장 바꿀 수 없어 오랜 시간 방치해 둔 부분도 있었다. 당시 우리 회사는 일층과 지하를 창고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비가 올 때면 물이 넘쳐서 지하에 쌓아둔 제품이 부식되기 일쑤였다.(우리 회사는 펌프를 수입해서 국내에 납품한다.) 그때마다 바닥에 펌프를 틀어서 발목까지 넘실거리는 물을 빼내는 게 일상이었다. 돌이켜보면 펌프 회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번은 일층과 지하를 연결한 화물 엘리베이터 통로로 직원 한 명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물건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내려가면 지면 한 구석이 뚜껑 열린 맨홀 마냥 꺼져 있어서 매번 근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만 보았다. 칸막이를 설치하는 등 나름의 고육책을 마련했지만 산업 재해임이 분명했다. 천만다행으로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두면 비슷한 일이 반복될 게 분명했다. 오랜 고민과 협의 끝에 사옥을 부수고 다시 짓기로 했다. 50년 가까이 된 건물이 수명을 다하기도 했고 지난 세월 동안 함께 힘을 모아 벌어둔 돈이 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미국과 중국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한 그 해 겨울 이사를 시작했다. 건물을 허물기 전 날 함께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똑같은 작업복에 외투를 껴 입고 털귀마개까지 한 채 콧물을 훔치는 모습이 흡사 난민 행렬로 보였다.(지금도 가끔 그 사진을 보면서 우리끼리 낄낄 거리곤 한다.) 지하에 가득 찬 철제 기계를 빼내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꼬박 일주일을 밤낮없이 짐을 옮기고 콘크리트로 지하 공간을 모두 매웠다. 30여 년 동안 회사를 거쳐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곳에 함께 묻혔다. 


 1년 여의 유랑을 마치고 새 사옥으로 입주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허물어져 가던 건물은 플로팅 주차장과 엘리베이터를 갖춘 지상 5층의 네모 반듯한 빌딩으로 탈바꿈했다. 일전에 면접 보러 온 지원자들이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지레 놀라 발길을 돌리곤 했는데 이제 적어도 그런 웃지 못할 해프닝은 없으리라. 그리고...


 또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직접 챙겨야 할 긴급한 업무가 많지 않다. 믿고 맡길 수 있을 만큼 동료 직원들이 성장했기도 하지만 세세하게 모든 일을 챙길 만한 에너지가 내 안에 더 이상 없기도 하다. 좀 더 정확하게는 얼마 남은지 모르는 내 시간을  더 이상 사업과 육아에만 쓰고 싶지 않다는 바람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과의 첫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면 몇 초간 주저하게 된다. "사업하고 있습니다." 겨우 내뱉은 한마디에는 힘이 실려 있지 않다.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고 낯빛에 익숙해져야 비로소 "가업을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조심스레 고백(?)하곤 한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내가 맨땅에서 일으킨 사업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 한 구석을 여전히 붙들고 있다.


 나는 전형적인 사업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성공에 대한 욕망도 크지 않다. 2개월에 한 번 회식하는 것을 제외하면 늘 혼밥을 하고 접대 문화는 사라진 지 오래다. 회사가 정체 상태인 것도 비사교적인 성향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저 내 시간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고 신뢰하는 사람들과 함께 오랜 기간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 회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이기는 하지만 땅콩 회항과 물 잔 던지기가 도마 위에 오르고 공정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면서 이전보다 더 가업 승계를 언급하는 게 조심스러워졌다. 무임승차한 기분이랄까...


 오랜 기간 내가 강박 장애를 앓아 온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이를 밝히는 것도 어쩌면 낙하산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고픈 얄팍한 마음 때문이다. 감히 열심히 살아왔다고 당당하게 말하기에는 내가 받은 혜택이 분에 넘치고  나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 할 소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배 부른 푸념이지만 지금 하는 사업에 몸 담고 있는 한 낙하산 출신이라는 굴레는 내가 안고 가야 할 업보라고 자조하곤 한다.


 나는... 타인의 인정을 갈구해 왔다. 겉으로는 쿨한 척 독야청청하면서 살았지만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비록 내가 낙하산이지만 나름의 곤경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노라고 울부짖는다. 감히 타인의 어려움에 빗댈 수 없어서, 어찌 됐든 지금은 이전보다 훨씬 더 평온함으로 일상을 마주할 수 있어서 침묵을 지켜 왔을 뿐 나 또한 내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누군가 인정해 주길 바랐던 비루한 인간이다.


 다시 안양천 변을 걷는다. 멀지 않은 곳에 성산대교 상단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수많은 물줄기가 합쳐져 한강으로 유입되고 또 여러 강물이 더해져 바다에 이른다. 오랜 시간 낙하산이라는 이름의 물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 길과 함께 지난 40여 년 간 헤쳐온 다른 물길들을 바라본다. 공부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그마저 무너졌던 고등학교 시절, 실체를 모르는 내 안의 나와 싸우며 소진했던 군 생활과 첫 직장, 아내와의 만남과 세 아이를 키우며 함께 분투해 온 나날들... 그 길 끝에 지금의 내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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