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깊이5

by 정동주

차에서 내린 당신은 고대 검투사처럼 버티고 서 있는 부회장을 응시한다. 무릎 꿇어. 부회장의 명령에 당신은 순순히 길바닥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명령을 기다린다. 당신을 내려다보는 부회장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튄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당신은 몇 년 전 스페인에 여행 갔을 때로 되돌아간 느낌이 든다. 열광하는 관중들도, 결투를 앞둔 비장한 표정의 투우사도, 겁을 먹은 소도 모두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느껴진다. 투우장의 소가 어떻게 죽는지 아세요? 그때 가이드는 이렇게 설명했다. 투우장에 들어선 소는 단박에 죽지 않고 크게 3번의 공격을 당하면서 서서히 죽게 됩니다. 첫 번째는 말을 탄 기사에게 당합니다. 그는 긴 창으로 소의 목덜미를 몇 차례 깊이 찌릅니다. 두 번째는 3명의 조수가 나와서 민첩한 동작으로 2개의 짧은 창을 소의 등에 내리꽂습니다. 그러면 소는 급격하게 공포를 느낍니다. 이때가 되면 경기장의 군중들은 흥분하여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게 되고, 소는 죽을 힘을 다해 투우사에게 돌진하기 전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게 됩니다. 세 번째는 메인 투우사의 칼에 의해 지친 소는 최후의 일격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때를 생각하는 당신의 눈에는 부회장이 보이지 않는 붉은 천 뒤에 칼을 쥐고 당신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마지막 기회를 엿보고 있는 투우사처럼 보인다.

마스크 벗어. 마스크를 벗으면서도 당신은 계속해서 속으로 웅얼거린다. 이제 당신의 심장을 향해 다가올 칼의 날카로움을 예상하면서 당신은 몸을 부르르 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해고의 순간을 장엄하게 기다리고 있는 당신의 얼굴 앞으로 갑자기 커다란 궁둥이가 불쑥 나타난다. 당신은 순간적으로 움찔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요란한 소리가 당신의 귀에 전달되면서 고막을 진동한다. 놀란 당신은 처음에는 무슨 상황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냄새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몇 분 전에 차에서 맡았던 그 냄새다. 부회장의 것으로 확신했던 바로 그 구린 방귀 냄새이다. 오늘은 이쯤 해두는데 앞으로 또 그러면 그때는 국물도 없어. 부회장은 이 말을 남기고 차를 향해 당당하게 걸어간다. 부회장의 방귀 냄새를 흡입하는 것으로 벌칙은 끝날 모양이다. 당신은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런데 조아린 무릎을 매만지면서 일어서려는 순간, 당신은 당신을 쳐다보고 있는 한 사람과 시선이 마주친다. 이혼 후 아내가 양육하고 있는 당신의 아들이다. 순간, 당신 얼굴은 수치심에 달아오른다. 그 많은 사람 중 하필이면 당신의 아들이 목격자가 된 것에 대해 당신은 비교할 수 없는 비참함을 느낀다. 그러나 더는 그런 감정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다.

몇 번의 신호등을 통과한 후 자동차가 회사에 도착하기까지 당신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심한 모욕을 당했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차가 정지하자마자 부회장은 황급히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당신은 부회장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천둥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방귀를 동시에 배출한다. 비록 부회장에게 모욕을 당했고, 아들에게 그런 굴욕적인 모습을 들켰지만, 그래도 해고를 당하지는 않았으니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인 것이다.

다시 당신의 배가 부글거린다. 당신은 업무규정을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배에 힘을 주면서 당신은 규정을 읽어 나간다. 이제는 외울 지경이지만 아직도 낯선 조항들이 많다. 업무규정 10조 1항. 운전기사는 부회장을 해치거나 부회장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2항. 운전기사는 부회장이 내린 명령이 1항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복종해야 한다. 3항. 1항과 2항의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한 운전기사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당신은 이 규정을 어디선가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 후에 아이작 아시모프가 제안한 로봇의 원칙이었다는 답을 찾는다. 여하튼 이런 원칙이 세상에 소개된 지 50년이 넘었지만, 세상은 실상 그다지 바뀐 것은 없다는 생각에 당신은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당신은 이내 고개를 젓는다. 부회장의 비위를 잘 맞출 수만 있다면 지금의 직업도 그런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그동안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부회장은 당신보다 5년 연하이다. 항상 그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떠 있다. 그동안 당신은 그의 웃는 표정을 거의 본 기억이 없다. 무엇보다도 참기 어려운 것은 그의 변덕이었다. 표정이 없다가 갑자기 화를 내고 욕을 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폭언과 폭행을 잘 참아내면 배려나 감사가 있을 것이라고 규정에는 있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당신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7시까지 부회장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의 집 근처에 옥탑방을 얻은 것도 지각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부자 동네에 싼 집을 얻다 보니 천정이 낮아서 허리를 펴는 것은 불가능했다. 집에 들어오면 마치 꼽추처럼 허리를 펴지 못하고 지내야만 했다. 부회장 집에 도착하는 시간부터 퇴근하는 시간까지 할 일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거의 로봇과도 같았다. 당신의 와이셔츠는 항상 청결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저녁에는 꼭 세탁소를 들러야 했다. 그 가맹점 세탁소의 주인은 예전에 당신이 사장이었던 시절에 당신의 비서로 일했던 김 비서였다. 가맹점 세탁소는 세탁물을 배달해 주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도 김 비서는 당신의 세탁물을 특별히 배달해 주었다. 사실 세탁물을 맡기고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호의가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어제는 세탁물에 봉투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뜯어보니 연극 표였다. 예전에 사장님께서 연극을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서 연극 표를 하나 넣어 봅니다. 앞을 향하여 한눈팔지 않고 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가끔은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도 필요합니다. 티켓과 함께 들어 있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의 과분한 친절에 당신은 불편한 마음도 들었다.

이전 04화상실의 깊이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