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이야기
대학을 타지에서 다닌 탓에 가족과 보낸 시간이 적었지만, 임용고시를 보기 좋게 낙방한 덕분에 그 귀중한 시간에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엄마가 경도 인지장애, 그러니까 치매 전 단계를 진단 받기 3년쯤 전부터 외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셨다. 엄마가 진단을 받을 때 쯤에는 이미 요양병원에 계셨다.
2020년도 극초반까지는 아직 코로나가 확산되지 않아서 면회가 자유로웠다.
그래서 매주 목요일마다 엄마를 따라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을 들렀다.
할머니는 어느날은 날 알아보셨고, 어느날은 나를 윤경이라고 부르셨다. 그래도 난 첫 손주라 기억에 깊이 남아있었는지 내 존재를 아시는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하루는 할머니께 "저 내일 이모랑 해외여행 가요! 이모가 저 졸업한 기념으로 데려가 주신대요!"라고 신나서 말했다. 할머니는 멍하니 쳐다보시다가 천천히 "어디로?"라고 물으셨다. "마카오요!"라고 답하자 또 천천히 웃으시며 "좋겠네~"라고 말하셨다.
할머니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날 보시다가도 또 어느 때는 생생하게 날 보셨다.
엄마는 그런 우릴 지켜보면서 연신 눈물을 훔쳤다.
우리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엄마의 아버지는 엄청난 고집쟁이시다. 당시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매일매일 긴 거리를 걸어 할머니를 보러 오셨다. 아침 먹고 할머니를 보러 걸어오셨다가, 점심을 먹으러 댁으로 가셨다가, 오후에 다시 병원을 들르는 게 일상이셨다.
엄마랑 내가 할머니를 찾아봬는 목요일도 예외는 없었다. 고집쟁이인 할아버지는 할머니 밥그릇을 꼭 다 먹고 남은 햇반 그릇을 재활용해서 쓰셨다. 아마도 살림을 안해본 90 가까운 노인은 위생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으셨던 것 같다.
엄마를 비롯하여 이모와 두 삼촌들은 항상 할아버지를 말렸다. 그 햇반 좀 그만 쓰라고. 그게 얼마나 더러운 줄 아냐고. 그날도 할아버지는 그 햇반 그릇을 쓰려고 하셨고, 엄마는 또 말렸다. 게다가 할머니의 물병은 어떻게 닦으신건지 안에 물때가 많이 끼어있었나보다. 엄마는 물병과 햇반을 버리려했다. 할아버지는 소리치며 고집스럽게 구셨다. 엄마는 짜증과 슬픔이 뒤섞인 목소리로 "내가 아빠 때문에 일찍 죽어, 아빠 때문에"라고 말했다.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은 왠지 침묵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엄마의 상태를 모르신다.
엄마의 형제들만이 알고 있다.
이젠 90이 넘어버린 노인에게 당신의 자식이
당신 아내를 죽게 만든 그 병에 걸려버렸다고 말할 순 없기 때문이겠지.
할아버지는 가끔 신년인사를 하실 때나, 무언가 교훈이 될만한 말씀을 하려고 하실때면 먹어버린 귀만큼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치매를 조심해야해, 치매를! 그게 아주 무서운 병이거든!"하고 외치신다.
그럴때면 우리는 모두 가끔은 씁쓸한 표정으로, 때로는 텅 빈 표정으로 "그렇죠, 그럼요."하고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