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을 부르는 사람들
오래 살았다고 하면 다들 콧방귀를 뀔 테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어리다고 할 수는 없고, ‘영포티‘라 조롱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당히 어른스러운 티는 내야 하는 그런 나이가 되어버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잘생겼는지와는 별개로 동안 소리를 들으며 없는 자신감을 그나마 채웠지만, 이젠 그런 짓거리도 부질없기만 한 세대 안에 들어왔다. 아직 결혼도 안 했고 심지어 짝도 없는 마당에 점점 올라가는 시간의 가속도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내 친구들은 짝을 찾기 위해 지금 동분서주다. 올해는 꼭 여자 만나서 결혼하자며, 이래서 여자들이 좋아하겠냐고 놀리면서도 결혼을 쟁취하겠다고 다짐하는 친구들 눈에는 마치 불꽃이 이글거리는 느낌이다. 요즘은 만나기만 하면 이런 이야기들뿐이라 나로선 마냥 공감이 가진 않는다.
그러다가도 술 한잔 들어가고, 그동안 맞선 자리에서 거쳤던 수많은 진상녀 썰 듣고 있으면 사회생활 순간순간마다 날 괴롭혔던 진상 밉상 꼴불견들이 겹쳐 보여 공감하게 된다. 키 작고 배 나오고 미혼에 여친도 없는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 패밀리가 퍽퍽한 현실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유일한 순간이지 않을까 싶다. 차마 글에 담을 수 없는 온갖 까다로운 조건을 들먹이거나, 일단 알아보자며 연애 먼저 했다가 갖가지 형태로 통수를 치는 여자들 앞에서도 나를 제외한 우리 친구들은 오늘도 화이팅이라고 단톡방에 톡을 보낸다.
그러다가 마지막쯤엔 항상 나한테 왜 결혼 생각이 없냐고 묻는다. 일단 당장은 혼자인 게 좋다고 얼버무리곤 하지만, 사실 사람에 하도 치이던 탓에 쉽게 사람에 대한 신뢰가 생기지 않는 게 더 크다. 나도 한때는 이성을 만나기 위한 모임에 몇 번 나갔지만, 돌아오는 건 여자들의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그녀들의 무표정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소개팅 앱은 가상의 여자들에게 수많은 뻰찌를 받아 진작에 포기한 상태였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고,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 사람이란 무엇인지 최대한 순화해서 표현하자면, 검증이 필요한 존재다. 내가 뭔 돌아이 짓을 하더라도 최소한 감정에 취한 비난을 퍼붓지 않는 사람인지 확실히 알고 싶은 거다. 참다 참다 막판에 확 터지는 분노가 훨씬 치명적임을 알기에 최악의 감정 퍼붓기는 서로 지양하고 싶다. 그게 말이 되겠냐며,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거라고 비난하는 자가 대부분이라는 건 이미 숱하게 겪어서 알고 있다. 그들은 나에게 뭐 그렇게 바라는 게 많냐며 핀잔을 주기만 한다.
그런 그대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본인 입으로 말한 대로 당연하게 타인의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지 말이다. 사람이란 존재가 이성적 사고가 가능해서 아주 유능해 보이지만, 들리고 보이는 것에 상당히 휘둘리는 존재다. 그때그때의 불쾌한 감정을 완벽히 다스리며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 자는 이미 신 혹은 메시아의 영역에 들어갔다. 그게 가능한 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앞에서는 여자의 예시가 많았지만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연인과의 관계에서 절대 권력이라도 얻은 양 여자 친구를 괴롭히는 남자도 여럿 있다. 옛날에 가부장제부터 시작해서 여성이 사람 취급도 못받았던 역사가 전 세계에 기록되었다. 자기 마누라에게 주먹질하고 얼굴에 멍칠과 피칠을 했던 이야깃거리가 2000년 이전 영화 및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다. 심지어 이런 남성 우위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상당 기간 당연하게 여겨졌다. 여자의 관점에선 수천 년이 지나 이제서야 권리를 되찾는 셈이다.
이성을 구분하지 않고도 친구, 가족, 혹은 상하 관계가 있는 사이라면 관계에서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아무리 사이가 좋았어도, 한번 감정이 확 틀어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서먹해진다. 요즘 존속살인이 그렇게 많다고 들었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그 피를 보고야 마는 끔찍한 사건이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다. 뭐 그리 바라는 게 많고 당연하다 여기는지, 절대다수가 그러하다 하니 거슬리는 내 생각이나 개성 같은 건 그냥 내 똥고집으로 치부하고 버려야 하는지,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위치가 뭐라고 내가 또 희생해야만 하는 건지. 자기 입장에만 한껏 취한 이들에게 남들이 뭐라 하는지 어떤 상태인지 같은 건 더 이상 알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는 부처가 아니다. 나도 우리도 결국은 다른 동물에 비해 기능이 조금 많아서 좋은, 인간이란 ‘종’에 속할 뿐, 한정된 인지능력으로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요지경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다 똑같다는 말이다. 당신 생각, 내 생각 모두 신의 처지에선 거기서 거기일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