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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식 Aug 27. 2024

고독한 폴리 베르제르의 바(완)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4)

작가의 말 : 근 2일간 시골에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글도 올리지 못했죠. 더 이상 젊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골과 관련된 모든 시간을 독서에 투자했습니다. 확실히 꼬집어 무언가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나름 재밌었습니다.



"낙찰입니다." 던이 경쾌하게 말하며 가벨을 경매패드에 가볍게 내리쳤다. 해머 프라이스 532억 4200만 원. 수수료를 포함하면 620억 2700만 원이다. 낙찰작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 낙오된 듯 어딘가 지쳐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 여성 바텐더의 그림이다.


해가 지지 않는 공간의 이글루를 연상시키는 감정실에 낙찰자와 경매사인 던이 마주 보고 앉아있다. 2주 전부터 공간의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하드 캐리어도 그 자리 그대로이다. 던에게 아늑하게 느껴졌던 빨간 퀼팅 소파의 금단추 장식이 지금은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낙찰을 받은 남자는 얼핏 보면 30대 전후로 보였다. 던은 앞의 남자가 지금까지의 낙찰자들에 비해 다소 어리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재벌 교육이라 던가, 인맥 형성을 위해서라던가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대리자격으로 오는 2세, 3세들도 많으니 말이다. 이 남자도 필시 그런 종류의 목적으로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보통 그렇게 오는 비교적 젊은 참가자들은 경매작 혹은 낙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베를레인이 운영하는 여객선의 가격이나 대접하는 음식에만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


남자는 포마드로 깔끔히 올려진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더니 까만 테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던은 심호흡을 했다. 사무장, 아니 메이가 했던 후과정은 이제부터 자신이 해야 한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는 이미 이 세계에서 사라져 버렸다. 시곗바늘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움직이는 것처럼 틀림없이 벌여져야 했던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섬을 떠나갔다. 아마 앞으로도 다시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숲벽 안의 이름 모를 그림과 함께.


 던은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낙찰가와 수수료, 그리고 그런 일은 없겠지만 대금이 입금되지 않으면 벌어질 상황까지. 잠자코 차분히 듣던 남자도 회수팀의 미지불 대금을 받는 방식에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전달해야 할 사항은 전부 전달했으니 지금부터 하는 말은 오로지 던의 독단이다.


"그림을 사야만 했던 이유를 말해주시길 바랍니다. 한 문장 혹은 단어여도 괜찮습니다. 적절치 못한 이유라고 해서 낙찰이 취소가 경우는 없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진, 던이 예상했던 대로 소위 말하는 제발 2세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자소스를 곁들인 포아그라가 주메뉴인 한 레스토랑에서 시작해 현재는 각지에 수많은 호텔을 소유하고 있다. 진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니며 호텔에 관한 지식을 쌓았다. 딱히 재미랄 것도, 그렇다고 싫증이랄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다들 겪는다는 반항기 또한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 후에는 경영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 후에는 호텔 하나를 맡아 경영한다는 이미 정해진 먼지 하나 없는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딱히 불만은 없었어요. 뭐 나름대로 운이 좋은 인생이라고도 생각했죠. 가고 싶은 곳은 갈 수 있고, 먹고 싶은 것은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다는 게 보통은 삶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프랑스의 소도시 보르도에서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잘 조여진 십자볼트가 어떠한 충격도 없이 갑자기 튕겨 나오는 것처럼, 진이 보르도에서 만난 금발의 종업원은 순식간에 그의 내면을 파고들어 자리 잡았다.  카밀이라는 이름을 가진 21세의 소녀였다. 우연히 밤거리에 나가 들른 작은 와인바에서 만난 동갑의 소녀는 그의 인생 첫사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찬란한 밤도시의 야경을 커튼 사이에서 상영해 주는 호텔 방의 어떠한 고급 와인보다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분주히 움직이며 저가술과 음식을 나르는 그녀를 보며 마시는 싸구려 블렌디 와인이 최고로 훌륭했습니다."

진이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 눈을 감고 행복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의 우리는 많이 어렸어요."


방학에 잠깐 머무르려 했던 프랑스에서의 날은 하루씩 연장되었다. 진은 가게가 문을 여는 시간이 되면 지체 없이 들어가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술을 시켰다. 소녀도 그를 점점 의식하게 되었고 진의 취기 어린 용기에 둘은 교제를 시작했다. 진은 데이트가 끝날 때면 매일같이 그녀에게 최고급 음식과 옷을 선물해 주었고 처음엔 거절하던 그녀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그 당시의 진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던 것이다.


프랑스의 빈민가 출신인 카밀은 진의 생각과는 달리 그리 순수한 여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정규 교육을 받는 진보다 훨씬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저건 연기일 뿐이에요. 저 두꺼운 까만 렌즈 뒤에는 또렷한 시력이 분명 있어요." 강 위를 잇는 회색벽돌 교량에서 구걸을 하는 맹인에게 돈을 건네려던 진을 단호히 말리며 카밀이 말했다. 방학은 점점 끝나가고 진은 다시 대학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울먹거리며 조금만 더 곁에 있어달라는 그녀의 말에 진은 휴학을 결심했다.


"그때만 해도 그녀에게 이상함을 느껴본 적은 없었어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건 사귄 지 2달이 약간 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선물을 받을 때의 고마움의 빛은 점점 카밀의 얼굴에서 사라져 갔다. 진과의 데이트 중 수시로 연락을 확인하며 몸이 안 좋아서, 집에 일이 있어서 등의 핑계로 먼저 돌아가는 일이 잦아졌다.


"여자의 촉은 무시할 수 없다고 합니다만 때론 남자의 촉도 그에 못지않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녀를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녀를 몰래 따라가면서 점점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집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이었거든요. 그녀는 도시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서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맨션으로 들어갔습니다.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알려준 집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말이죠. 견딜 수 없던 저는 끝까지 숨어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체감 상 한 시간이 정도 흐르고 그녀가 나왔습니다. 혼자가 아니었죠.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던 남자는 분명 제가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제가 그녀를 만났다고 했던 곳 혹시 기억나나요?"


"기억납니다." 던이 말했다.


"와인바에서 조용히 담배를 피우며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그녀의 고용주, 바로 그 남자였습니다." 진이 잠시 말을 멈추고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딘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저는 그 광경을 본 순간 주저앉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2일 동안 호텔 방 안에서 폐인처럼 갇혀 지냈습니다. 청소부도 들이지 않았기에 술병만 쌓여갔습니다. 그녀에게 오는 연락도 받지 않았죠. 그녀가 직접 제 호텔로 찾아왔습니다. 계속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인지 저를 더욱 깊은 어둠에 몰아넣을 진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는 방문을 열고 그녀를 맞이했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아요. 걱정했잖아요. 술병들은 또 뭐예요. 혹시 힘든 일 있어요? 높은 도수에 희석시켰던 제 감정은 그녀의 그 말에 모조리 폭발해 버렸습니다. 쏟아내는 제 말에 그녀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있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하, 아쉽네. 어차피 다 알았는데 볼일은 없겠네요. 전 가볼게요."


진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뒤돌아 서는 카밀의 팔을 낚아채며 말했다. "언제부터 만난 거야. 나를 사랑하기는 했던 거야?"


"난 처음부터 네가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알고 있었어. 사장에게 들었거든. 너네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들이야. 세상의 좋은 면만 보고 살려하고 그 외의 것들에서는 눈을 돌리려고 하지. 그러면서 우리가 힘들게 사는 이유는 우리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말해. 앉아 돈만 세면서 말이지. 길거리를 떠도는 들개 보다 잠을 못 자며 매일같이 노동만 하는 우리가 게으르다고? 천만에 너희는 그냥 어쩌다 우연히 얻은 고급 지지지에 그럴듯하게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용어만 갖다 붙일 뿐이야." 처음에는 조소를 띠던 카밀은 어느샌가 격분해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사장과 짜고 저에게 접근한 것이었어요. 태어난 환경이 결정된 시점부터 그녀의 내면은 이미 검게 물들어 있었죠. 저는 사람들 사이에 계급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이 게으르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었죠. 하지만 제가 그런 또 다른 삶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 너무 어렸다와 같은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의 눈에 저 또한 부조리한 조각의 일부로 보일 테니 말이죠. 카밀에게 저와의 사랑은 하나의 수단이자 표현된 복수였습니다. 지금 이 나이까지 카밀 이외의 새로운 여자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제 기억 속 카밀은 아직까지 제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죠. 호텔에서 저를 비웃으며 화내던 모습, 맨션에서 사장과 어딘가 상기된 얼굴로 나오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까지 가슴이 저리지만 곧장 그 짧은 기간 나누었던 행복한 모습들로 대체가 됩니다. 최근에 우연히 그녀를 만났습니다. 프랑스에서 열린 베를레인 전시회에서 말입니다."


"그녀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던이 말했다.


"처음 만난 그 모습을 간직한 채 걸려 있었습니다. 지금은 경매사님과 제 앞에 놓여 있고요."


-폴리 베르제르의 바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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