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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식 Aug 27. 2024

우리의 사각을 메꿔줄 기억의 지속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5)

작가의 말 : 글을 쓰기 위해 학교 중앙 도서관 카페에 왔습니다. 어젯밤 숲벽에 갇힌 던과 메이의 2주간의 스토리를 짜면서 굉장히 흥분했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구독을 눌러주시고 끝까지 스토리와 함께해 주시면  감사하겠니다.




여름의 섬은 유난히 구름이 많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움직임을 알아차리기가 힘들지만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섬을 전체적으로 뒤덮고 있는 한 조각 퐁듀케이크 같은 구름뭉치를 보고 있으면 모든 걸 잊고 뛰어들고만 싶은 충동이 든다. 낙하하는 몸이 새하얀 수증기들의 모임에 닿으면 그대로 뿔뿔이 흩어지고 어떠한 그물망과의 접촉 없이 그대로 포구 앞의 바다에 빠져버린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의 끝에 닿으면 비로소 몸은 해체가 되고 던은 편안히 눈을 감는다. 섬 전체를 떨어진 시선으로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원에 가까운 타원일 것이다. 마지막 우주비행사가 멀어져 가며 보는 푸른 별과 던 자신이 구름 속에 빨려 들어가며 내려다보는 섬의 모습은 그다지 차이가 없을 듯하다. 차이가 있다면 아마 색이겠지, 하고 던은 멀어져 가는 섬의 모습을 그려본다. 알맞은 구름이 덮은 구형의 섬의 중심을 기준으로 선을 긋는다. 선을 그리며 떨어져 나온 촉이 휘어진 만년필의 부스러기는 땅에 흡수되고 주름진 기둥들이 자라난다. 태양빛을 받은 기둥들은 조금 더 어둡게 갈색에 가까운 색을 띤다. 파도들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바람들이 갈색의 기둥을 스쳐 지나가며 잎이 자라나고 나무가 된다. 그러한 나무들이 경계를 만들고 섬은 정확히 반으로 갈린다. 경계를 기준으로 서로 다른 성질의 세계가 섬 안에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이질적 형상을 숨기려는 듯 섬을 구름을 부르고 던을 붙잡아둔다. 


-2일 차


페어선의 갑판에서 던과 메이는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점심이라고 해봐야 데워먹을 수 있는 가공된 쌀밥과 모서리가 찌그러진 참치캔뿐이다. 섬에는 조리기구라 부를 만한 것이 전자레인지와 커피포트밖에 없기에 별 수 없다. 메이가 놀란 부분은 5년 동안 던이 먹어왔을 조촐한 식사환경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대낮부터 압생트를 꺼내온 던의 알코올 중독자 같은 면모에 일종의 감탄을 느꼈다. 밥을 비우고 그곳에 물을 말아먹는 옛 어른들의 습관처럼 던은 비운 플라스틱 밥 용기에 술을 따라 마셨다. 메이도 던을 따라 똑같이 했다. 쌀밥의 전분과 알코올이 만나며 허브 향과 목 넘김이 직관적으로 느껴질 만큼 훨씬 깊어졌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앞으로 이런 데워먹는 밥을 본다면 술이 생각나겠군, 하고 메이 나름대로 허싸한 허브향의 순간을 즐겼다. 던은 가끔씩 빛을 반사하며 튀어 오르는 가시 달린 물고기를 바라보며 메이가 없던 시절의 경매 경험을 이야기했다. 감정실은 있지만 감정사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호가를 왜 경매사가 올리는지 등 메이가 호기심을 느꼈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베를레인이라는 하나의 명사는 이미 미술품의 가치를 넘어선 모양이다. 그들만의 세계에서는 미술품이 원본이라는 증명서보다는 베를레인의 이름이 적힌 보증서가 더 값어치가 있는 듯 하니 말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뭉크의 절규가 아닌 베를레인에서 낙찰받은 절규였다. 던이 나름대로 가격을 매기고 그 가격으로 낙찰시키려는 것은 어떤 의지에서 나온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예술계에 대한 존경인가, 반항인가. 직접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듯 하지만 굳이 파헤칠 필요도 없다. 던의 내면세계와는 별개로 메이 자신은 지시받은 명령만 이행하면 된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던은 메이에게 숲벽으로 안내해 준다고 했다. 원래였다면 굳이 신경 쓰지도 흥미를 느끼지도 않았겠지만, 섬에 있는 이상, 며칠간 더 있어야 한다면, 꼭 가야만 한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포구에서 베를레인으로 향하는 밭길을 중심으로 양옆에는 밭이 펼쳐져 있다. 조례를 하는 사병들처럼 밭에 솟아오른 작물들은 행과 열을 규칙적으로 맞추어 자리 잡고 있다. 잎은 가끔씩 흔들리지만 바람 때문은 아닐 것이다. 던은 메이와 걸어가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달리의 기억의 지속이라는 작품을 아세요?" 

메이는 잎에 흔들리는 생동감을 부여하며 뛰어오르는 메뚜기를 보며 대답했다. "처음 들어봐"


다리 한쪽이 부러진 메뚜기가 착지에 실패해 떨어져 뒤집혔다. 그 상태로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온전한 나머지 다리를 버둥거린다. 공사장 앞 구덩이에서 발버둥 치던 여자가 겹쳐 보인다. "아, 기억나" 메이가 다시 답했다. 


"그 작품은 500억 대에 낙찰됐어요. 당연히 경매는 제가 맡았어요. 메이씨도 알다시피 이 섬에 있는 경매사는 저 하나뿐이니까요. 제가 가벨을 패드에 내려치는 순간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어요. 어딘가 잘못됐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제 눈을 응시하고 있었죠. 그 여자는 감정실에 들어와서도 어딘가 불편해하는 모습이었어요.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죠. 마실 것을 찾는 여자에게 전의 사무장님이 커피를 내어왔어요. 계속해서 들이켰죠. 시간을 끌려는 것처럼. 저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피하는 것 같았어요."

메이도 아는 여자다.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였다. 


"한참 뒤에 여자가 커핀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어요. 남편의 대리로 경매에 참여했으나 지금 잠시 남편과 연락이 되지 않아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누군가 감정실의 문을 노크했어요. 문을 여니 사람은 없고 편지지 하나만 놓여 있더군요. 저와 사무장은 여자를 기다릴 겸해서 편지지를 열어 읽었어요.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그 여자에게 보낸 편지였어요. 그 시간에 여자가 감정실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기라도 한 건지. 알고 보니 그 편지의 주인은 그 여자의 남편이었어요. 자신의 수행비서와 바람이 난 사실을 알고 있다는 내용이었죠.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람피운 대가가 위약금 353억의 빛이라니. 아무래도 그 젊은 여자는 그만한 돈을 낼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었나 봐요. 물론 그녀의 집안도 말이죠." 던은 말을 마치고 메이를 바라보았다. 


"이게 제 얘기의 전부예요.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 아까 얘기의 연장일 뿐이에요. 저는 회수팀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그 뒤의 내용은 몰라요. 돈을 다 받아냈는지. 받아냈다면 어떻게 받아냈는지 궁금하지도 않고요. 제 역할은 가벨을 내려치며 낙찰자를 확정하며 끝날뿐이죠."


메이는 다시 시선을 밭으로 돌리며 포테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 여자를 떠올렸다. 그때의 메이는 베를레인의 회수팀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여자를 찾아낸 곳은 도심지의 한 술집이었다. 그녀는 자기 나이를 두 번 더한 것보다 많은 나이의 남자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살고 있었다. 메이와 팀원들은 그녀가 퇴근할 시간까지 기다렸다. 해가 뜰 무렵 그녀가 비틀거리며 나왔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녀를 뒤에서 덮쳐 차에 태웠다. 그대로 달려 어떠한 사정으로 계획이 중단된 공사판으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던 그녀였지만 몇 대 맞은 후부터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잠자코 있었다. 


그들은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그녀를 집어던졌다. 그다지 깊지도 얕지도 않게 누구나 노력을 한다면 기어 올라올 수 있을 정도의 그러한 깊이였다. 그녀가 올라올 때마다 밀어 다시 구덩이로 집어던졌다. 몇몇 팀원들은 구덩이를 향해 오줌을 누기도 하고 침을 뱉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오면 누구나 체념하기 마련이다. 보이지 않는 와이어가 발목을 감고 있는 듯 올라갈 생각을 단념하고 마는 것이다. 그 순간에 그녀를 꺼낸다. 


"안녕하세요. 베를레인의 회수팀 팀장 메이라고 합니다." 메이가 온몸이 흙과 배설물로 더럽혀진 그녀를 향해 말했다. 눈물로 화장이 번져 끔찍한 몰골이었다. 베를레인이라는 말을 듣자 여자의 메마른 육체가 다시 반응을 했다. 


"저는 돈이 없어요. 남편 대신에 참가한 것뿐이라고요." 여자가 높은 톤의 목소리로 소리 지르듯이 말했다. 


"돈이 없는 건 이미 조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낙찰자는 어디까지나 본인입니다." 메이가 무표정으로 말했지만 목소리는 다정했다. 


"그럼 왜 저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메이의 따뜻한 목소리에 반응을 했는지 다시 흐느끼며 말했다. 


"353억을 내셔야 하니까요. 다행히 저희는 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본인의 아름다운 외모와 젊은 나이 덕분에 눈을 파고 배를 가를 일은 없습니다. 얼굴의 가죽을 벗길일은 더더욱 없죠. 이름이 포테이라고 했죠. 이제 당신은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배에서 생활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몸을 섞게 되겠죠. 그 몸 하나로 몇십 년간 남자와 자기만 한다면 353억을 벌 수 있다니 참 놀라운 세상 아닌가요? 저는 그 배에서 생활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까지의 생활과 동일할 겁니다. 혹시 모르죠. 지금은 이혼한 전의 남편처럼 몇백억을 내고 젊음을 사들일 남자를 만날지. 이제 슬슬 배가 들어올 겁니다. 아무튼 행운이 있길"


메이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나머지 팀원이 남아 배로 그녀를 넘길 것이다. 배가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은 물론 그녀에게 악몽과 같을 것이다. 자신의 팀원들의 놀라우리만치 끔찍하고 괴랄한 성욕의 표출은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으니 말이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라면 더더욱. 


메이는 차를 탔다. 실크 소재의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공사장에 뒹구는 긴 파이프가 몸 안의 구멍으로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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