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안다는 것

‘왜 사는지’보다 시급한 문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by 김경현

※ 저의 기획은 [How -> Why]로 흐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부터, 다소 굴곡졌던 제 삶을 되돌아보며 정말 중요한 이야기부터 진지하게 고찰해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삶에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한계를 발견하는 방식이 무수히 많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Think outside the box(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 더 직관적으로는, ‘상자’를 벗어나서 생각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실 상자 안에 머물면서 상자 바깥의 존재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방조차 쉽지 않다. 우리는 굳이 고대 경전이나 현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일상의 경험만으로 이 사실을 자주 확인한다. 마음속에서 충동적이고 때로는 역겨운 상상이 솟구치는 일을 매일 겪는다. 물론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대단한 존재’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과감히 말하고 싶다. 인류 대부분은 비슷한 결을 공유한다고. 다만 그 마음이 솟을 때 그것을 제어하는 사람과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인간이라는 물리적 신체에 갇힌 이상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살아온 환경에 구속되고, 편견을 갖게 되며, 반성을 한다한들 그 반성마저 나만의 ‘상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에 첨단기술의 이야기를 얹어보자. 고성능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우리가 인간의 뇌를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확보할 것이고, 우리의 사고 체계를 철저히 추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우리 능력에는 한계가 있음’이라는 사실을 다른 방식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지식이 수천 배, 수만 배로 늘어도 우리가 우주라는 공간 안에 머무는 한, ‘완벽’에 도달할 수 없다. 불완전한 존재가 또 다른 불완전한 손(기술)을 빌린다 해도, 그 자체로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은 우리네 논리로도 벌써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자 밖에서 생각하라”는 말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푸념인가, 혹은 발전을 강요하는 동기부여인가? 아니면 그런 슬로건이라도 걸어두어야 사람들이 몸을 던져 한계를 깨닫고, 그 과정에서 겸손하고 슬기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때문인가?


나는 이 말을 좀 더 녹진한 철학이 녹아든 문장으로 이해하고 싶다. 내게 이 말은 명령도, 푸념도, 단순한 동기부여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 존재를 정면으로 관통하는 ‘인간 존재 묘사’이다.

상자 밖에서 생각하는 것이 ‘절대 객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여기서 말하는 ‘객관’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인간들끼리 만든 질서 유지를 위한 객관(합의로서의 객관)이고, 다른 하나는 이 물질계를 관장하는 절대 객관 그 자체다. 그 절대 객관을 인간이 상자 밖에서 그대로 사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하려 한다. 그것은 의지로 “나는 안 할래”라고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원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어제보다 나은 생각이 아닐지라도 계속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방 안에 갇혀 있어도 삶은 계속되고, 그 과정의 흔적이 필연적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회수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태생적으로 상자 안에서 상자 밖을 향해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향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위 같은 생각을 해본 사람도,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도, 결론적으로는 ‘상자 바깥을 향한 에너지 방향’으로 산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계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동기만 다를 뿐이다. 경쟁심 때문이든, 진리 탐구 때문이든, 신념 때문이든, 생업 때문이든, 단순한 욕구 충족을 위해서든. 따라서 한계를 발견하는 과정과 한계 인지 이후의 삶의 방식은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다. 위의 과정은 나의 방식일 뿐이다. 어떤 이에게는 직업이고, 어떤 이에게는 일상의 경험이며, 어떤 이에게는 철학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종교다. 그렇다면 이왕 사는 거, 한 번일 수도 있는 삶이라면, 다양하게라도 맛봐야 하지 않겠는가. 타인에 대한 포용은 무리라고 하더라도, 내가 나 자신을 포용하는 마음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다양한 맛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배움을 버릴 수가 없다. 내 한계가 수십 번, 수백 번 반복되어 증명된다 해도, 지금 여기서 살아 숨 쉬며 매일을 살아내려는 에너지의 방향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계에 순응하더라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내보고 싶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삶을 본능적으로 욕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함부로 업신여기지 않으며 겸손한 사람을 예찬하고 칭송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렇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일수록, 그가 낮춘 만큼 더 많은 공간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로 채울 수 있음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칠게 축약한다면, 그러한 삶 자체가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