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지’보다 시급한 문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2)
좋은 것과 나쁜 것.
어떤 사람은 좋은 것을 나쁜 것의 반대로, 나쁜 것을 좋은 것의 반대로 본다.
또 어떤 사람은 그런 이분법이 거칠다고 말한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가 오히려 진정한 좋음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어떤 현자는, 인간이 주관적 관념으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태도 자체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좋음과 나쁨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며, 세상은 그 자체로 정합적이라고 말한다. 고대 중국의 도가사상에서 이런 관점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일희일비’ 하지 않게 되는, 보다 중심 있는 삶의 태도를 습득하게 된다.)
좋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객관적으로 완벽하게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것을 안다.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는 주관적인 인간들의 손에 의해 발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래에 이어지는 나의 논변 모두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좋음을 전혀 다루지 않거나, ‘정의할 수 없으니 무의미’하다고 방치한다면, 인간의 삶 자체가 제대로 굴러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인간은 매일 선택해야 하고, 선택은 비교를 전제하며, 비교는 최소한의 평가 기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좋음이 세상의 객관적 성질인지 여부와 무관하게, 인간이 선택을 수행하는 방식 자체가 어떤 형태의 ‘좋음’ 혹은 ‘나쁨’ 개념을 요구한다. 따라서 좋음의 정의를 명확히 제시하기보다는, 적어도 우리가 좋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먼저, 좋음은 나쁨의 단순한 반대라고 보기 어렵다. 역으로도 같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가 일순간이라도 존재함을 자각한다. 보통은 '자기'와 이해관계가 먼 상태에서 관점을 열 수 있을 때 이 영역의 존재를 쉽게 느끼는 것 같다.
어떤 경우에는 무관심이다. 선호가 없으며,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상태다.
어떤 경우에는 판단 보류다. 정보가 부족하거나,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해서 지금은 좋다/나쁘다를 말하기 어려운 경우다.
어떤 경우에는 혼합이다. 일장일단이어서, 단순히 한쪽으로 결론 내리기 어렵다.
(물론, 판단자의 정보의 한계에서 비롯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핍으로 인한 선호를, 최소한 ‘선호’라고 부르지 말자고 약속하지는 않기에, 이러한 형태의 좋음 나쁨 평가도 최소한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 자체를 진정한 좋음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이 역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는 단순히 그 당시의 반사적인 선호 판단이 어려워서 생기기도 하지만, 그러한 중립 상태를 의도적으로 원하는 동기로 작동할 때도 있다. 즉 “지금 판단하는 것이 나쁘거나(부당하거나), 나중에 판단하는 것이 더 좋다(안전하다)”라는 평가를 전제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다시 말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가 “좋거나 나쁘다”라고 이미 판단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이 점은 ‘진정한 좋음’이라는 주장에도 타격을 준다. ‘진정한 좋음’이라는 말이 문언상 가치판단으로부터의 해방, 즉 어떤 평가에도 끌리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면, 지금처럼 이미 “무엇이 더 낫다"는 평가가 필연적으로 개입하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한, 곧바로 ‘해방’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이제 남는 입장은 하나다.
좋음과 나쁨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 행동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가치 개념이며, 이를 고정된 판단 기준으로 삼을수록 불필요한 혼란이 증폭된다고 본다. 이 입장 역시 실천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어떠한 기준이 없을 때 불안정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삶에서 매일 선택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비교를 한다. 비교는 “더 낫다/덜 낫다”라는 최소한의 평가 틀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좋음과 나쁨은 객관적으로 허상이다”라는 명제는, 인간의 삶을 실제로 운영하는 방식에 사실 그만큼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즉, 좋음은 인간이 일생을 살며 선택을 수행하는 한 완전히 폐기하기 어려운 평가 범주다. 또한 이 범주는 전면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일정 정도까지는 가늠 가능한 공통 재료를 포함한다. 예컨대 고통의 회피 및 안정 추구라는 생존 관련 경향 외에도, 신뢰의 손상에 대한 민감성, 노골적인 부당함이나 일방적 착취에 대한 반감은 문화와 시대가 달라도 넓게 관찰된다.
위의 내용을 총정리하면, 좋음은 언어와 경험의 주관성 때문에 완벽한 정의를 갖기 어려운 개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인간 삶의 선택 구조에서 필수적인 평가 범주로 기능하며, 어렵더라도 좋음에 대한 추정과 상호 간 조정이 가능한 단서가 존재함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좋음과 나쁨의 경계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앞선 논의를 통해, 좋음이라는 관념이 인간 사회에 분명 존재한다는 점과, 그 내용을 완전히 합의된 형태로 규정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경계선을 긋는 작업은 더 난해해진다. 한쪽의 기준이 비대해지는 순간, 다른 누군가의 선택 가능 범위는 필연적으로 줄어든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은, 현자들이 일찍이 지적했듯이, 반복적으로 불필요한 갈등을 낳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선택하며 살아가야 한다. 삶을 끝내는 게 아닌 한, 좋음에 대한 고찰을 유보하거나 폐기하는 태도는 현실적으로 지속 가능성이 떨어진다. 현자들이 설파한 집착을 낮추는 방식은 일정 부분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을 실제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좋음의 단서를 더 정밀하게 점검하고, 임시적이더라도 경계선을 세우는 작업이 필요하다. 결국 공동체를 위한 이유든 개인의 성장이든, 심지어 우위를 추구하는 욕망이든, 선택하며 살아가는 이상 ‘좋음의 과제’는 피할 수 없다.
정말 가혹하면서도 고무적인 것은, 선천적 조건과 재능이 서로 다른 수십억의 사람들이 그 작업을 결국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혹하다는 말은 그만큼 합의의 작업이 어렵기 때문이고, 실패와 충돌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고무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어렵기 때문에, 아주 조금이라도 전진하더라도, 그만큼 분명한 해방감과 충족감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개인의 차원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 작업이 어떻게 ‘공동’의 과제가 되고, 공동체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거나 왜곡되는지의 문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그 내용은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