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쳐야 산다

‘왜 사는지’보다 시급한 문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3)

by 김경현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내가 나비 꿈을 꾼 걸까, 나비가 내 꿈을 꾼 걸까?”라는 물음으로 인간의 세상에 대한 인식의 경계를 흔들었던 것으로 유명한 고대 중국 철학자 장자는, “人之生,氣之聚也;聚則為生,散則為死”(사람의 삶은 기가 모인 것이니, 모이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구절을 남겼다. 여기서 ‘기’는 영혼과 같은 초자연적 실체보다는 생명력, 생명적 기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원론적으로 생사를 설명한 이 구절의 취지는 후대에 전래되며, 오늘날에는 결집과 단결을 촉구하는 표어로도 흔히 참조된다.


그리고 위 표어는 현대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호출된다. 근대 로크(존 로크, John Locke)식 사회계약론의 영향 아래, 개인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며, 그들의 존엄과 가치는 최대한 보호되어야 한다는 관념은 오늘날 상식에 가까운 전제가 되었고, 이 개념은 초급 교육 현장에서도 자연스럽게 체화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인간 욕구가 맞물리며 급격히 발전한 기술이 인간의 역할을 점차 대체하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기계 vs 인간 / 인간 vs 인간] 양각 경쟁은 일상을 더욱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사회의 구성원들은 너무나 쉽게 각자도생 하게 되었으며, ‘퍼스널 브랜딩’은 자기 보존을 위한 최후의 몸부림으로도 보인다.


이런 흐름에서 공동체주의가 다시금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것은, 시대가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사유의 귀환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모든 것을 [물리치고] 홀로 정상에 오른다고 했을 때, 그 승리를 승리로 알아봐 줄 사람이 남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재차 던지면서, 현 세태의 종착점이 결국 누구에게도 만족스러운 결말이 아닐 수 있음을 드러낸다. 철학자들의 이름을 단순 열거하는 행위는 사유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고리타분한 그들의 이름을 한 번씩은 거론하고 갈만하다.


매킨타이어(Alasdair Chalmers MacIntyre), 찰스 테일러(Charles Margrave Taylor),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은 공통적으로 “개인은 공동체 없이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매킨타이어는 덕(virtue)이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에서 자의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실천과 전통 속에서 형성된다고 본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개인의 근본적 질문에, ‘나’가 어떤 역사와 규범의 맥락 속에 있는지 자각하고, 그 전통을 끊임없는 논쟁을 통해 갱신하며 답변할 수 있다고 본다.

테일러는 정체성이 본질적으로 ‘대화적’으로 형성된다고 보며, 타인과 사회로부터의 <인정>이 개인의 자아 형성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샌델은 롤스(존 롤스, John Rawls)식 자유주의가 개인을 ‘어떤 소속에도 본질적으로 묶이지 않은 채, <선택>으로만 자기 삶을 구성하는 존재’로 가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족, 사회, 역사와 연결되어 있고, 그 속에서 정체성과 책임이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를 단지 각자의 <선택>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는 규칙을 만드는 프로세스로만 이해할 수 없으며, 무엇이 공동체에 바람직하고, 또 무엇이 공공선을 이루는지에 대해서 함께 논의해야 하며, 그 논의를 정치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본다.

세 사람의 논의는 결론적으로, 공동체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외부 조건(가령, 공동체 보존을 위한 일종의 규율)이기 이전에, 개인의 정체성과 도덕적 판단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 본질 속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좋음’을 논하기 위한 필수조건

이전 글에서, 비교하고 구분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특성상, ‘좋음’이라는 개념은 자연 필수적이며, 그리고 그것을 공동체에서 함께 논해야 함을 밝힌 바 있다.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우리는 혼자의 힘만으로는 더 나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우연히 극단적 고립 속에서 자란 이들의 잔혹한 ‘언어 박탈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충분한 언어적 상호작용이 제공되지 않았던 아이들은 언어를 스스로 안정적으로 체계화하지 못했고, 사회인지와 자기 조절 같은 고차원적 기능 발달 역시 심각하게 제한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혼자서는 쉽게 바로 설 수 없다는 점을 쉽게 망각한다. 우리가 이미 처한 현실을 돌아보면, 나약한 인간이 군집을 이루고 수많은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전승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는 언어로 경험을 구분해 명명하고, 서로의 판단을 조정하고 확장한다(때론 타인을 통해 내 생각이 적어도 부적절한 것은 아님을 되비쳐 보기도 한다). 다시 말해 더 나은 생존 전략, 더 나은 삶, 그리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에 대한 구상은 언어라는 사회적 인프라 위에서만 누적되고 정교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철학자들처럼 공동체를 인간의 본질로까지 규명하지 않더라도, 개인적 효용의 관점에서조차 함께 살아가는 것이 최소한 나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왜곡된 ‘좋음’의 발전사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좋음’의 탐구가 각자의 삶과 자존심을 덧씌운 소모적인 대결 구도로 흐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야말로 가장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단일한 ‘좋음’이 있으며, 그것이 타인의 것과 견주어 완벽히 입증될 때 발견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애초에 비교하고 서열을 매기기 쉬운 ‘개채 존재적으로’ 태어났기에, 그 믿음이 손쉽게 굳어지곤 한다. 그렇다 해도 주변을 모두 물리치고 ‘좋음’의 왕으로 우뚝 선다 한들, 그 승리가 과연 그렇게 결정적인가. 결국 그 입증이란 불완전한 인간들 사이에서, 불완전한 기준으로 이루어진 판정일 뿐이다. 더구나 내가 ‘진정한 왕’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 근거가 다수 인간의 인정이라면, 완벽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가장 불안정한 근거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겸손을 요구하는 말에는 “옆에 있는 나도 힘들고 눈꼴사나우니 자중하라”는 짜증이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다른 이유도 있다고 본다. 겸손하지 않은 태도, 다시 말해 스스로 가능성을 닫아버린 확신을 고집하는 순간, 우리는 언제든 더 나은 논리와 더 큰 역량을 가진 존재에게 무너질 여지를 스스로 열어 둔다.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은 그 ‘먹이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사슬에 더 깊이 자신을 묶어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이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이기에, 겸손을 권하는 말에는 “네가 잘 살고 싶다면, 그 태도는 좀 위험할지도”라는 안타까운 시선도 담겨 있는 것이다.


짧은 인생 경험에 불과하지만, 인간은 결국 최소한 자신과 동등하거나, 자신보다 ‘더 나은’ 존재의 인정을 욕구하는 존재인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더불어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좋음’을 타인과의 경쟁 척도로만 삼는다면, 인정 욕구는 오히려 충족될 수 없다. 비교우위 끝에는 나를 인정해 줄 수 있는 더 낫거나 최소한 동등한 타자가 모두 소거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실제로 도달하고자 하는 객관적 ‘좋음’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로부터 멀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모든 것을 대결의 관점으로만 바라볼 것인가. 모두가 진리를 원한다 말한다면, 결국은 각자의 위치를 상호 존중하며 그 방향으로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다 알겠는데, 그래도 너무 힘들다

불편한 진실은, 위 내용을 현실에서 이행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더 나은 삶’을 바라면서도, 각자에게 주어진 재능과 시간은 지나치게 다르다. 마주치는 고통과 쾌락의 종류도 다르고, 그 농도 역시 제각각이다. 지구라는 삶의 환경은 제약이 크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에 자주 놓인다. 심지어 요즘은 사람이 너무 힘들어서, 사람 때문에 병들고 사람 때문에 고통스러워, 이 아름다운 세상을 스스로 떠나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덮어두고 밝은 미래만을 상상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의도가 불순하고 악마적일지도 모르는 상대의 이면까지 억지로 들여다보고 이해해 보자고 주제넘게 제안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하지 못할 일을 남에게도 하라고 떠미는 어리석은 제안은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인간 세상에서 현자로 추앙받는 사람도 결국 인간이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주는 사람도 결국 인간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삶을 향유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애쓰는’ 존재들이다. 겨우 흠결만재(欠缺滿載)한 인간들의 손에,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를 운명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참 억울하지 않은가.


또 효용의 관점에서 보자면,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 어쩌면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누군가의 도움 위에 서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도움을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미약하게나마 건네는 순간, 그것은 돌고 돌아 예상보다 큰 이익과 의미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 번쯤은 속는 셈 치고 살아 볼 만하지 않은가. 더 나아가, 그 누구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좋음’을 당신이 찾아낼 수 있다. 그러니 어리석은 자들의 공론의 장에 함께해 도움을 주길 조심스레 청한다.


뭉쳐야 (네가 살고, 우리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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