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지’보다 시급한 문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4)
고대의 현자와 철학자들, 그리고 현대의 자기 계발자들은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삶에 강력한 힘을 준다고 여러 방식으로 말해왔다. 어떤 이들은 복잡한 어휘와 문장 구조로 이를 설명하고, 어떤 이들은 “이해가 안 되면 외워라”는 식의 윽박지름에 가까운 태도까지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 역시 “나보다 훨씬 나은 존재들의 깊고 많은 통찰이 있으니, 긍정적으로 사는 게 최소한 내게도 도움이 되겠지” 하고 넘어가게 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는 점에서 벌써 그들의 생각이 나한테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는 점을 반증한다! 마치 선생님의 의중은 모르겠으나 일단 외워야 시험을 잘 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말이다.
따라서 앞선 지식인들의 통찰 선물 상자를 내 식대로 풀어헤쳐보지 않으면 나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긍정적인 태도란 무엇인지, 왜 그렇게 사는 것이 좋다고 보는지, 그리고 결국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는지를 내가 이해해 본 과정을 가능한 한 쉽게 풀어보려고 한다. 이렇게 정리해 두어야 나중에 다시 보더라도 오래도록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1) 내 생각에, 앞선 지식인들의 담론을 두루 살펴봤을 때, ‘긍정’은 단순히 의도적으로 기분 좋은 상태를 가지고자 하는 태도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환경과 관계, 삶의 과업 속에서 쌓아온 ‘경험 세계관’이 있고, 그 세계관은 순간순간의 상호작용을 자동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게 만든다. 여기서 긍정은 바로 그 자동해석에서 한 걸음 물러나, 눈앞의 즉발적인 문제에 매달리기보다 더 넓은 시야를 토대로 뜻밖의 발견과 깨달음을 향해 태도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상대의 관점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나 자신을 공개적으로 시험대에 올려 검토받는 일도 감수한다(단지 반론을 위한 반론이 아닌, 자신의 의견을 자신 있게 표명). 이런 선택들을 긍정적 삶의 태도로 총칭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포용력이 있다”라고 느낀다. 상황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보며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가능성을 먼저 열어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오 좋다”, “나쁘지 않다”라는 반응을 자주 하는 것이다(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긍정적인 사람의 말버릇).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면, 함께 일하는 사람과 다툼이 생길 것 같을 때가 있다. 이때 많은 사람은 그 다툼에서 이기는 일이 곧 문제 해결의 필수 단계인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반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다툼의 승패에 매달리기보다 문제를 더 크게 보고, 해결을 위해 상대와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조절하며 나아갈 줄 안다.
(2) 오케이, 취지는 알겠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다 한들, 결국 내가 더 많이 생각해야 하고 내가 더 짐을 지는 순간이 종종 생길 것 같다. 불공평하지 않은가. 왜 그래야 하는가. 더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비용이 너무 커서 나의 ‘지불 능력’마저 고갈시킨다면, 그 태도는 오히려 나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 맞다. 나 역시 현대 자본주의의 충실한 일원로서 당연히 그 의문을 떠올렸고, 고민해 보았다. 그 내용을 아래와 같이 풀어본다.
먼저, 긍정적인 태도와 함께 자주 거론되는 반대 개념으로 ‘부정적인 태도’가 있다. 부정적인 태도는 자신을 이렇게 옹호한다. “겉모양의 기분 좋음에 매달리는 사람들아, 내가 있기에 모두가 못 보는 위험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러하다. 회의적인 시선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사실을 드러내고, 분위기 맞추기에 가려진 문제를 끄집어내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된다.
다만 여기서 한 번 구분이 필요하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부정’ 그 자체라기보다 ‘검증’이다. 긍정적인 태도는 현실을 외면하며 낙관만 하는 태도가 아니다. 앞선 정의에 제공했듯, 오히려 한 발 물러서 감정을 정리하고, 내 태도를 주체적으로 조율하며, 필요하면 의견을 분명히 내놓아 상대의 논리와 실제로 부딪쳐 보는 태도다. 이런 과정에서는 누군가가 놓친 위험 요소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고, 견실한 검토를 할 수 있다. 요컨대 리스크를 탐지하는 능력은 ‘부정’과 ‘회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부정적인 태도는 감정에 잠식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때로는 감정을 이용하여, 내가 ‘정당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착시 현상을 제공한다(정당한 행위를 했을 뿐, 상대방이 연약하고 수준 미달이라는 위험한 고양감, 우월감). 현대 사회생활의 주요 격언인 “기분이 태도가 되게 하지 말라”를 정반대로 실현하기 쉬워진다. 소모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추구하는 순환 구조에 빠질 수 있다.
또한 부정적인 태도는 보다 수동적이다. 상대의 의견이나 주어진 환경을 주체적으로 곱씹고 조율하기보다, 즉각적인 반응을 내놓는 데 급해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논술을 해본 사람이라면 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어떤 주장에 “아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대개 값싸고 쉽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닐 수 있다(진리의 케바케!). 다만 비용 계산에 있어 이런 잠재적 위험은 치명적인 요소이고, 배제되어야 할 독소이다.
이제 이 내용을 비용 계산식으로 깔끔히 정리해 보겠다.
긍정적인 태도에는 대략 [개인의 심력] + [상호작용을 유지하며 조율하는 데 드는 시간과 자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여기에 상대의 비생산적 발언을 받아내는 비용까지 포함될 수 있다.
부정적인 태도에는, [개인의 심력] + [섣불리 잃게 되는 상호작용의 잠재적 가치]가 포함된다.
개인의 심력은 대체로 긍정적인 태도에서 더 많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비용은 가시적이며 제어 가능하다. 심력의 한계에 부딪히면 항복 선언과 함께 회복에 돌입하여도 무방하다(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자에게 항복은 그렇게 비참한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부정적인 태도의 후단에 붙는 ‘잠재적 가치의 상실’은 크기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언제, 어떤 형태로, 얼마나 큰 손실로 돌아올지 알 수 없다. 보수적으로 계산해 보아도 이 비용을 가늠하기 없다는 점에서, 드는 비용이 조금 더 크더라도 제어 가능한 쪽을 택하는 것이 ‘예측 가능성’에 집착하는 자본주의 주체들에게 훨씬 합리적이지 아니한가?
(3) 최종적으로 그렇다면 이런 주체적인 긍정 사고는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가. 이것은 공교육이 풀어야 할 큰 과제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는 지면의 한계와 독자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개인이 스스로 해볼 수 있는 부분을 내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이 경험은 협소하고 적용 범위도 제한적이지만, 누군가에게 작은 영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억울하고,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갖게 된 성정이 급하며, 환경이 여의치 못했던 자들을 위주로 조언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다. 이러한 성향보다는 최소한 사람들과 환경을 해석해 내는 데에 체력이 덜 드는 사람들은 그대로 잘 수행하면 될 것이다. 나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성정이 급했고, 늘 억울하다는 감각을 안고 살았다. 주어진 환경도 그런 성향을 더 심화시키기 쉬운 조건이었다. 머릿속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했고, 태도는 방어적이었다. 지금도 어떤 사건을 마주치면 부정적인 생각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최소한 지금의 나는, 사람이나 문화, 단체, 더 크게는 자연환경의 이질성을 마주하더라도 버텨낼 힘을 조금은 갖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체력은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가. 이것은 타인과 협력하여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힘들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계속 말을 걸어보아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세상을 올곧게 경험하고 있다고 믿기 쉽다.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는 그렇게‘만’ 세상을 이해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우리는 피부, 눈코입 말고는 세상을 느낄 수 있는 방식이... 놀랍게도 더 없다. 굳이 더 찾는다면... 영적인 공명?). 그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 있다. 당연한 게 당연한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감각이 당연한 것인가?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흥미롭게 관찰한 점이 있다.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믿는 확신이 강할수록, 어떤 사안에 대한 규정적 단정을 먼저 내리고, 그 틀에 맞지 않는 것들은 곧바로 부정하거나 배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당연한 것이 꼭 당연한 것은 아닐 수 있다”라고 여기는 사람은, 가능성을 조금 더 열어두고 다음 단서를 찾는 쪽으로 움직이곤 했다.
이유를 조심스럽게 짚어보자면 이렇다. 어떤 것이 당연하다고 굳게 믿는 사람은, 스스로 이미 세상의 법칙을 꿰뚫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에 조금만 어긋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오류’로 판단한다. 반대로 세상의 이론을 한 번 더 고민했을 때, 해당 ‘오류’는 새로운 발견의 실마리가 된다. 그러면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동하고, 그 과정에서 이러한 사고 과정의 단초가 되는 긍정적인 태도, 곧 주체적으로 가능성을 열어둔 채 탐색하는 태도가 실제로 도움이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내가 권하고 싶은 가장 단순한 훈련은 이것이다. 일상에서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최소한 한 번은 입 밖으로 꺼내어 보라. 그리고 스스로 묻자. 왜 나는 이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는가. 그 믿음은 어떤 경험에서 왔는가. 다른 해석은 가능하지 않은가. 다만 이 태도를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기존의 전통과 원칙이 모두 틀렸으니 의심하고, 필요하면 부숴야 한다는 제안이 아니다. 자기의 삶을 보다 이롭게 하기 위하여, 내가 가진 확신이 사람과 상황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도록, 질문의 폭을 한 번 더 넓혀보자는 제안이다.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방법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쉬운 길로 느껴지는 때가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