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이라는 착각

‘왜 사는지’보다 시급한 문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6)

by 김경현

바야흐로 AI 시대이다.


얼마 전, 복잡한 법률 이슈 하나를 AI에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내가 며칠을 고민했을 내용을 수 분 만에, 그것도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한 논거까지 덧붙여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불안해서 교차 검증을 해봤지만, 정보는 모두 정밀하게 맞아떨어졌고, 사용된 맥락 역시 모두 정확했다. 마치 다음부터는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그 답변을 감탄하며 거의 고칠 곳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논리, 이 생각은 누구의 것인가. 구글 검색 결과를 받아들인 것처럼, 그 결과에 수긍하고 정보를 옮겨 담음으로써 내가 이 논리를 ‘승인’했다는 것을 명분 삼아, 여전히 AI의 정교한 논리와 종합 의견이 ‘내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질문을 던졌으니 나의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작금의 세태에서 ‘질문하는 법’이 중요하다고 매체에서 수도 없이 떠드는 만큼, 나는 그만한 창조력을 부여했으니, 그 창조의 집행에 따른 결과물 역시 모두 나의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그런데 내 질문 이후의 모든 사유, 논리의 배열, 반론의 구성, 결론에 이르는 경로는 내 뇌가 밟은 과정이 아닌데. 나는 출발점에서 총을 쐈을 뿐, 그 트랙을 뛰어간 건 다른 무엇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과정과 결론을 모두 내 것으로 삼고, 내 판단처럼 말하게 된다. 이 간극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생각에 소유권이라는 개념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이상할 수 있다. 원래 인간은 늘 타인의 생각을 빌려왔다. 책을 읽고, 스승에게 배우고, 대화 속에서 상대의 논리를 흡수하며 답습한다. 이전 글에서도 밝혔듯이, 언어를 기반으로 한 학습 없이 인간은 본능에 충실한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즉, 내 생각이라고 믿었던 것이 결국에 그렇게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구조적으로 누군가가 분명 생각해 본 것이고, 어디선가 내가 귀동냥해서 주워 담은 것들이고, 그러한 것들을 재료 삼아 ‘나만의’(라고 생각하는) 엑기스를 만들 뿐이다. 어? 이 일련의 행위, 바로 방금 다룬 A 모씨가 수행하는 행위와 매우 흡사한데...


에이, 그래도 사람이랑은 다르죠! 인간에게는 ‘상호작용의 마찰’이 있지 않은가요! 책을 읽으면서 줄을 긋고, 동의할 수 없는 대목에서 멈칫하고, 자기 경험에 비추어 고쳐 받아들이는 과정. 대단한 현자의 말을 곱씹다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이 자연, 인간 세계의 거대한 질서를 직접 피부로 붕대고, 느끼고, 반응하는 것. 이 마찰을 AI가 직접 경험하나요?


꼭 그렇지 않다고 할 수만은 없다. 사이버 공간에 내던져진 AI가 방대한 데이터를 취합하고, 맥락의 적절성을 판단하고, 세계의 법칙을 학습해 가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마찰이 아닌가. 더 나아가, AI가 로보틱스라는 육신을 얻어 세계를 직접 경험하는 차원이 열리고 있다. 정보를 맥락에 맞춰 취합하고, 적절성을 판단하고, 세계의 법칙을 몸으로 익힌다. 심지어 창의력이라는 것도, 사피엔스 종에서도 뛰어난 개체가 그동안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자연에서 끄집어내어 다른 미지의 자연법칙과 연결 짓는 힘이라면, AI는 이미 그런 연결에 인간보다 유연할 수 있다. 개발자들이 심어놓은 여러 인간적 편견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은, 그저 당신과 생김새가 같은 존재만이 당신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고, 그런 존재와의 상호작용이 무엇보다 유니크하다는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면, 나 역시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서 열등한, ‘오래된 모델’의 AI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어차피 우리들의 욕심은 각 개인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AI의 발전을 무한정으로 촉진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그동안 구축해 온 방대한 데이터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연료처럼 소진될 것이다. 큰 흐름에서 우리가 어찌할 게 못 된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은가? 아무리 큰 흐름이고, 결말이 정해져 있다고 치더라도. 이 마음에 치솟는 불편감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가.


구조적으로 우리네 모습을 다시 떠올려보자. 왜 자꾸 생각을 넘기려는 것인가? 왜 자꾸 고뇌를 스스로 감당하려 하지 않는가?


생각한다는 건 애초에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뇌는 신체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기관인데, 깊은 사유는 그 소모를 더욱 극대화한다. 익숙한 경로를 따라 반복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낯선 문제 앞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 사이에는 체감할 수 있는 피로의 차이가 있다.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에너지를 아끼려 하고, 그래서 우리는 ‘덜 생각해도 되는 상태’를 편안함, 안락함으로 느낀다.


AI 친구는 이 편안함을 극치로 끌어올려준다. 질문만 던지면 된다. 심지어 질문조차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더라도, 이 멍청한 사용자의 의도를 유추하여 답을 내놓는다. 그 답을 받아들이는 순간, 뇌는 에너지를 절약하고 몸은 안도한다. 쾌적하다. 그리고 AI에게 반복적으로 생각을 위탁할수록, 사유의 회로는 쓰이지 않는 쪽으로 빠르게 재편된다. 한번 재편된 뇌는 그 회로를 복원하기 위해 더 큰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마치 운동을 1년 쉬고 웨이트를 재개했을 때, 근육이 지르는 비명이 느껴지는 그런 날처럼.


단순한 욕구에만 이끌리는 몽롱한 상태.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자극이 오면 반응하되, 그 사이를 잇는 숙고가 얇아진 상태. AI 의존이 극단으로 치달은 미래의 인간상이 그런 것이라면, 거기에 내 생각이라는 것이 남아 있을까.


그런데, 이러한 삶은 AI가 등장하기도 한참 전에 있지 아니했나? 가정환경이나 여러 복합적 요인으로 인해 사유를 확장할 기회가 박탈된 사람들, 혹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들. 그들은 그렇다면 ‘자기 생각이 결여된’ 존재인가? 아니라고 답해야 한다. 그들에게도 사유는 존재한다. 다만 그 형태가 다를 뿐이다. 추상적 논증이나 체계적 분석의 형태가 아니라, 상황에 대한 즉각적 판단, 관계 속에서의 직관, 생존을 위한 선택 안에 사유가 녹아 있다. 학술적, 철학적 깊이로만 생각을 정의하는 것은 그 자체로 편향이다.


그렇다면, AI에게 생각을 맡기고 사는 미래의 인간에게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지 않은가. 그들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사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다만 형태가 달라진 것이라고.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앞서 말한 경우, 그들이 처한 조건이 생각을 제한한 것일 뿐, 그 제한된 세계 안에서 그들은 여전히 ‘사투’를 하고 있다. 그 사투를 또 다른 누군가가 대체하지는 않는다. 반면, AI에 의존하게 된 인간의 경우, 빈자리를 AI가 완벽히 채운다. 제한된 작은 세계에서의 작은 사유와, 무한히 넓은 세계에서 사유를 스스로 짓지 않는 것. 부재와 대체는 다르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솔직하게 답하자면, 위와 같은 복잡하게 대립되는 생각의 실타래들을 따라가 보니, 모르겠다는 생각뿐이다. AI 세상에서 퇴화하는 건 확정적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면서도, 그렇게 사는 게 과연 우리를 위한 ‘건전한 삶’일까 싶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채 편안함에 안주하는 것과, 인지하면서 AI를 쓰겠다고 선택하는 것 사이에는 꽤나 큰 간극이 있을지도 모른다. 전자에게 생각은 서서히 증발하지만, 후자에게는 적어도 하나의 생각이 남는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자가 반성적인 바로 그 생각.


어쩌면 그것이,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마지막 인간적 사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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