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를 옥죄는 것
'최근 3학년 부장의 발언을 보면 매우 위험스럽습니다.
"수시입학에 봉사시간과 교내 수상 경력 등 비교과 영역이 매우 중요하다"
00 대학교에서 명목상 내세운 비교과 영역의 항목이 정말로 내신보다도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들이 정말 학업성적은 모자라도 봉사시간이 많은 학생을 뽑는 것인가요?
아니면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 중에 봉사시간이 많은 학생들을 들러리로 세우면서 특목고 학생들을 뽑을 명분을 만드는 것일까요?
본질을 정확히 아시고 지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아도 봉사활동 교내 포상이 교육적인 견지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과열로 치닫고 있는 우리 학교의 현실에서 3학년 부장의 발언은 과열을 부추길 위험이 있습니다.'
입시 담당 교사들 간 주고받았던, 학교에서 중점을 두어야 할 부분이 비교과 영역이라는 3년 부장에 대한 강경한 반박입니다. 상위권 대학의 입시 결과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학교에서 어느 방향으로 보다 입시지도를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입니다. 고등학교에서는 '교육=입시'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학교교육의 방향, 교육과정까지도 좌지우지합니다. 어느 날 서울대가 문과는 이과 교과 3개, 이과는 문과 교과 3개를 요구한다는 사항을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열린 학교 교육과정 회의에서 교육과정을 급조하여 대처한 적이 있습니다. 상위권 대학 이공계열에 진학하기를 원하는 수험생이라면 대학이 지목한 과목을 택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결국 일부 상위권 대학들의 입시 요강이 일반 학생들을 위한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좌지우지합니다.
특히 내가 맡은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는 3학년 담임들이나 입시담당 교사들은 상위권 대학들의 입시 요강 하나하나에 목을 매고 덤벼들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를 방문하는 각 대학 입시 담당관들의 입시요강 설명에도 입시담당 교사들이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메모하여 전교사에게 전달합니다. 교사 관련 어느 연수보다도 더욱 진지합니다. 당연히 고등학교는 입시에 종속되어 교육다운 교육은커녕 영향력 있는 대학교의 입시요강에 끌려다니기 바쁩니다. 더불어 수능에 맞춘 문제풀이 위주 수업, 자질구레한 입시 관련 정보에 목을 매고 치열하게 쫓아다니는 꼴로 교사의 역량도 더욱 비전문화 되어가는 기이한 현상입니다. 교육이라는 영역에서 아주 부수적인 ’입시‘라는 영역이 오히려 모든 것이 되어 학교와 교사들을 옥죄고 있습니다.
이러니 아이들에게 입시는 '복불복(福不福)’입니다. 입시 정보에도 빠르고 전문적이고, 알아서 '고퀄리티' 학생부를 만들어주는 담임교사를 만나는 것도 복불복입니다. 담임 역량과 성향 등에 따라 학생부의 완성도 차이, 그리고 입시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기부도 교사가 관찰한 부정적인 내용도 그대로를 진술하지 못하고 우회적이거나 미화된 표현을 써야 합니다. 학교에 따라서도 복불복은 유효합니다. 같은 지역 내에서도 명문대 진학률이 학교별로 나름 상당한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등학교들은 아이들의 입시 대비를 위해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아이들 머릿속에 ‘성적에 도움이 되나 안 되나, 입시에 도움이 되나 안 되나’를 바쁘게 계산하는 모습이 감지될 때마다 답답하기만 합니다. 교사들은 각 교과마다 다양하고 의미 있는 활동들을 펼쳐주려고 하지만, 아이들에게 의도한 바람직한 의미를 심어주기를 기대하기는커녕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행사로 전락되어 버립니다. 아이들도 각자의 입시 결과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만 최선을 다하고 억척스럽게 매달립니다. 모든 활동이, 모든 주체들이 입시라는 괴물에 매몰되어 끌려가는 꼴입니다. 학교에서는 교육다운 교육이 존재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거기에 대학이 책임져야 할, 입시를 위한 '공정성'이라는 요구사항까지 고등학교 교사들에게 부과되었습니다. 문제의식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교사들도 교육을 해야 하는지, 입시를 위해 달려야 하는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현실에 쫓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벗어던질 수 없는, 입시라는 괴물의 틀 안에서 모든 교육 활동들이 입시 성적만을 위한 기능적 교육에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데도 교육 정책가들도 교육의 본질이 무엇이든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합니다. 교육에 대한 철학이 부재한 정책들, 지극히 대중적이고 미시적인 접근만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리 해도 탈이 나고, 저리 해도 탈이 나는 형국입니다. 수능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 세지면 학종 비중을 늘리고, 학종 문제점이 부각되면 수능 비중을 늘리는, 심지어는 입시안을 4개의 선택지로 줄여 사지선다로 내놓고 국민에게 고르라고 하기도 합니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획기적인 ‘교육개혁’으로 앞서가고 있는 선진국들을 쫓아가는 노력은커녕 마치 공정하고 완전한 황금비율이 있는 것처럼 학종 대 수능의 비율을 몇 대 몇으로 하느냐, 그리고 자소서에 무엇들을 기입하면 안 되느냐 등 무의미하고 미세한 제도 개선에 온 교육적 에너지를 쏟고 있는 한심한 상황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미래를 대비하고 바람직한 교육을 위한 큰 틀의 개혁 의지보다는 미세한 제도 개선이 더 본질인 것처럼, 그리고 가능한 문제가 안될 수 있는 접근,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접근만으로 일관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변화, 개혁은커녕 더욱 심하게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입시’라는 틀을 깨버리지 않는 한 우리 교육은 계속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교사들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