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장이 변하면 학교가 변한다
‘교장, 교감이 학생들 상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담임이나 교과 교사가 수업 시간에 갈등을 빚거나 충돌하는 아이들과 일일이 대응할 수 없거나 지도가 어려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상벌점제를 운영합니다. 그저 아이들이 잘못하면 벌점을 주어 징계를 한다는 취지입니다. 학생을 지도와 훈육의 대상으로 보는 관계에서 벗어나 인격적 대상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관계 확립이 필요합니다. 해서 비교육적인 상벌점제 폐지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교감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안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교사들이 교육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그래도 힘들면 선진국들처럼 교사들을 대신하여 교장, 교감이 대신 상담해 주면 교사가 대응하거나 상담하는 것보다 효과가 배가된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절대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매몰찬 표정과 함께 돌아온 답변입니다.
하긴 머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 어떻게 올라갔는데 이제 와서 아이들을 상담하는 궂은일(?)을 다시 한다는 게 가당치도 않는 소리일 것입니다. 아이들과 공감하고 상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는지도 의문입니다. 나는 이 제안을 직·간접적으로 관리자들에게, 그리고 승진을 노리는 동료 교사들에게 자주 합니다. 관리자들이 수업 시간이나 학교생활에서 아이들과 교사가 마찰을 빚을 경우 교사들을 도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접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선진국가들의 학교에서는 당연히 강조되고 있는 교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들 중 하나입니다.
최근에 교사들의 잇따른 죽음이 보도됩니다. 2018년부터 공립 초·중·고 교원 100명 이상이 극단적 선택으로 숨진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죽음을 선택한 교사들의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략은 아이들 문제로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리다 비극적인 선택을 한 듯합니다. 내가 봐도 교사보다 나이가 많고, 사회 경험도 많은, 거기에 교사보다 더 잘났다고 들이 되는 학부모들을 상대하는 것은 경험이 미약한 젊은 교사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업무(?)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린 담임에게 반발로 훈계하듯이 하는 학부모도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이 교사들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전에 언급한 대로 교사의 개인적인 능력을 떠나서 학교 현장에서 교사가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이를 도와줄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전혀 갖춰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초임교사들을 포함한 젊은 교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더 안타까운 점은 이 교사들도 아마 교장에게 보고를 했거나 도움을 청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교장, 교감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보도입니다. 공식적으로 몇 번의 상담을 요청했다고 나왔습니다. 교장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청과 학부모에게 더욱 낮은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관리자의 입장에서 교사에 대한 적극적 옹호보다는 소극적 개입이나 방임으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선배 교사들도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래저래 학교 현장에 처음 발을 디딘 신참 교사들은 믿고 의지할 데가 없이 더욱 막막했을 것입니다.
학교 현장에 있다 보면 아이들과의 갈등, 학부모와의 갈등이나 민원은 당연히, 그리고 수시로 있습니다. 하다못해 나의 수업 내용에 대하여도 정치적 시각으로 교육청에 민원을 넣는 학부모를 겪어 본 적도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전제로 하는 왜곡된 입시 교육 현장에서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상들입니다. 아니 우리와 같은 입시체제가 아닐지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들과의 갈등, 학부모와의 갈등은 세계 각국의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따라서 교사의 죽음에 대해 누구의 탓인가를 따져보았자 그 원인들을 제거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하고 적절한 접근은 교사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이 있거나, 시스템이 있다면 제대로 작동하고는 있는 것인가를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스템 안에서 교사들을 지원하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관리자들이 선진국들의 교장처럼 적절한 역할을 하려는 의지는 있으며, 할 수 있는 능력은 있는가를 더 심각하게 따져 보아야 합니다.
한 아이가 또다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몇 번 있었던 것처럼 같은 반 급우를 폭행한 것입니다. 선도회, 청소년 상담실 1주, 사회봉사 1주, 그리고 학교 복귀 수순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를 아는 교사들은 모두 압니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워낙 골이 깊은 아이라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학생부 한 선생님이 직접 맡아서 지도하겠노라고 고난을 자초한 제안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지없이 절차에 따라 모든 아이들이 의례적으로 거치는 무의미한 처벌 과정을 겪게 합니다. 교육적 지도보다는 행정적 절차가 우선인 학교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도 모자란 지 교장의 특명이 떨어졌습니다. 학교 복귀하는 첫날 바로 교실로 보내지 말고 학생부에서 하루 붙잡아놓고 지도하라고. 학교 적응을 위해 다시 한번 주의주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무슨 주의를 주란 말인가? 가뜩이나 짜증 나는 과정을 거치고 이제 겨우 학교로 돌아왔는데 아이도 아이지만 수업에 바쁜 선생님들이 어떻게, 얼마나 효과적인 지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모두들 말합니다. 가뜩이나 지친 아이, 교장 선생님이 어루만지며 하루 지도하여 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요. 아이들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학교에서 일이 벌어지면 행정적 절차만 있습니다. 학교의 관리자들도 처벌 위주의 지시만 할 줄 알지, 아이들을 보듬는 마음으로 제대로 된 교육적 지도를 해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아이들 지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답답한 실정입니다.
학교 현장에서 대부분의 교장들이 교사들에게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성은커녕 권위주의적 자세만 기를 쓰고 유지하려고 합니다. 마치 그것만이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것처럼 합니다. 반대로 미국 학교 방문 시에 미국의 교장이 어느 정도 탈권위주의적이고, 교사 지원을 위해 잡다한 업무 수행조차도 당연시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지도 교수의 배려로 그 지역 중학교에서 수업을 참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고 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교문을 통과하여 학교 건물 현관 안에서 잠시 기웃거리며 방문하기로 한 교사의 교실을 찾고 있던 중 중년의 교사가 어디선가 불듯 나와 나의 용무를 묻습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모 교사를 찾아왔다고 했더니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합니다. 찾아가는 도중에 나눈 대화에서야 자신이 교장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내가 약속한 교사와 인사를 하고 신원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그제야 발길을 돌립니다.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 교사의 수업을 관찰하면서 계속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교장이 직접 나와 방문자를 확인한다?’
한국 학교에서의 근무 경험으로는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던 현상이었습니다. 우연히 방문자를 보고 나온 모양새는 아닌듯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도대체 교장실이 어디에 있길래 나를 보았는지, 그리고 수상하다고 여겨지는 외부인이 들어왔다면 어찌 교장이 직접 따라붙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이 기이함에 대한 궁금증은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행사에 참석했을 때 그 학교 교장의 모습을 보고 쉽게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3월의 그날은 방과 후 학부모들을 초청해서 각 교사들이 1년 동안 자신의 수업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즉 수업에 대한 계획, 학습 주안점, 평가 방식 등을 직접 부모들에게 설명하고, 수업방법 및 평가에 대하여 부모들하고 논의하고 토론을 벌이는 'Parent’s night' 행사이었습니다. 행사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학교에 도착해 보니 딸아이가 처음 학교 배정받았을 때 상담한 카운슬러, 그리고 행정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교장이 직접 방문하는 학부모들에게 일일이 안내장을 나눠주며 교실 위치에 대한 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사들이 없다는 딸아이 말에 그나마 안면을 튼 카운슬러에게 ‘교사들은?’ 물었더니 각자 자기 교실에서 수업 준비하며 학부모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교사들은 오직 수업에만 충실하고, 학교행사 준비는 모두 교장, 교감과 행정 직원들의 몫입니다.
이처럼 미국 교사들은 오직 수업과 학생지도로만 평가받고 있고, 그 영역에만 전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사들이 가르치는 일 이외의 업무 분담과 행사 준비에 더 분주할 때 미국의 교사들은 1년의 수업을 미리 완벽하게 계획하고 평가받습니다. 우리도 교사들이 수업에 집중할 수 있고, 이런 행사가 정착되었다면 교사들의 수업준비도는 상당히 높은 수준을 유지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동시에 부러움을 유발하는 행사였습니다. 나머지 학교행사에 관련된 행정 및 업무에 관한 것은 모두 교장과 행정 직원들의 몫입니다. 오히려 미국의 교장들은 우리의 교장처럼 지시하는 역할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수업지도, 그리고 모든 학교행사, 생활지도 등 모든 학교 활동 영역에서 교사들보다 몸을 더 낮추고 어떻게 하면 더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하며 보조 및 지원 역할을 힘들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내가 항상 의아스러운 것은 당연히 교사들을 지도하고 지원해야 하는 우리 관리자들은 교장, 교감 자격연수 때 무엇을 배울까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왜곡되고 부실한 관리자 양성이라는 제도적 문제점이 고착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의 글에서 미국에서는 등교가 늦거나 수업 시간에 안 보이는 아이들을 교사는 체크만 하고 행정요원들에게 넘겨 확인케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교사와 아이들 간, 그리고 아이들 간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는 정확하게 교실에서 일어난 일을 교장에게 보고만 하면 끝납니다. 나머지는 교장의 몫입니다. 교장은 카운슬러와 교감과 함께 교장실에서 아이에게 사실 확인을 하고 지도합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학부모도 소환하고. 의견도 듣고, 학교의 지도 방향도 전달합니다. 카운슬러는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 기관도 안내합니다. 아이 지도에 대한 체계적인 지도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번 초등 교사의 경우처럼 도를 넘는 학부모의 민원 제기는 교사 괴롭힘으로 규정하고 학교 차원에서 학교 건물 접근금지 등의 조치를 포함하여 단호히 대처합니다. 교사는 오직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고 그 밖의 사항들은 교장, 교감, 행정요원들의 몫인 것입니다.
우연히 보게 된 프랑스의 ‘The Class’라는 영화에서도 내가 그렇게 원했던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수업 시간에 학생의 잘못된 행동에 참지 못하게 된 교사가 그 학생과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망설임 없이 그 학생을 교장실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교장에게 교실 상황에서의 학생의 행동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당당하게 한 후 그 학생을 교장실에 남기고 바로 수업으로 복귀합니다. 평소에도 항상 있었던 상황인 듯 교장은 하던 업무를 중단하고 그 학생을 앉히고 직접 상담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선진국의 학교들은 교사들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있고, 그 시스템 속에서는 당연히 그 학교 현장을 맡고 있는 교장, 교감이 중심축이 되어 적극적으로 교사들을 지원합니다.
교실이 무너진다, 교권침해가 심각하다 등 야단을 떨지만 무슨 일이 발생하면 우리 교사들은 교장, 교감에게 제대로 된 지원 한번 받지 못하고 혼자 고전분투해야 합니다. 문제처리의 결과가 잘못되었을 경우 질책도 오롯이 교사의 몫입니다. 교권이나 학교 처벌이 약해진 상황에서 극히 일부 아이들이 이를 악용하거나 교사를 무시하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해대는 게 지금의 교실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교사가 직접 학생들과 부딪치는 것은 수업을 망칠 뿐만 아니라 수업에 참가한 학생들 전체에게도 피해를 주는 것이고, 교사의 모습도 추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는 학생들에게 ‘저렇게 해도 큰 탈이 없구나.’하는 동조적 의식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나 프랑스의 관리자들처럼 교장이 지원 시스템의 중심에 있어 그 역할을 다한다면 큰 문제가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장이 학생상담 역할을 맡아주고, 교장에게 당당히 학생 상담을 떠넘길 수 있는 교사의 행동처럼 교사와 교장의 관계가 동반 협력자로서 자리매김한다면 충분히 정상 운영이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교장이 직접 아이들을 상대할 때 아이들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아직 우리 학교에서는 아이들 마음에도 항상 가까이 접하는 교사보다는 교장이라는 지위가 막 대하기 어려운 지위라든지, 아니면 더 위협적인 존재라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장은 수업에 쫓겨가며 아이들과 부딪쳐야 하는 교사보다는 더욱 여유 있게, 그리고 교장이 전문적인 능력만 갖추었다면 보다 심도 있게 바람직한 상담 결과를 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학부모와의 상담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이러한 바람이 우리 교장들에게 너무 이상적인 요구일까요? 우리의 경우 교장, 교감들이 과연 학교 현장의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전문성이, 그리고 교사 지원을 위한 적극적 개입 의지가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교장은 권위적인 통제적이고 지시만 하는 역할입니다. 교사들이 모셔야만 했었고, 쉽게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조력자가 아니었습니다. 교사들이 아이들과 아무리 힘들어도 오로지 교사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교장의 역할이 바뀌어야 합니다. 지시만 하는 입장에서 교사들의 공문처리 및 학교행사 등의 잡무들을 대신해 주고, 같이 고민하고 지원해 주는 입장이어야 합니다. 교사들이 힘들 때 기꺼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인격적인 전문가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바람직한 상태로 아이들과 교사들이 살아나고 활기를 띠는 학교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