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장이 변하면 학교가 살아난다
'절차를 밟아서 오라.'
학교 운영에 관한 의견 제시를 위해 교장실을 직접 찾아갔을 때 교장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위계적 질서가 있으니 교감부터 거쳐서 의견 전달이 되도록 하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순간 어이없는 표정으로 교장실 입구에서 서있었던 내가 주제 파악을 못하는 잘못된 교사이었을 것입니다. 엄격한 위계질서를 무시하고 감히 평교사가 직접 교장을 대면하려고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교장이 스스로 권위를 세우려 하면 오히려 권위가 떨어집니다. 권위는 자신이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리고 남이 이를 인정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남들이 인정하지 않는데, 주려고 하지 않는데 억지로 요구하거나 갖추려고 하는 것은 권위가 아니라 권위주의라는 것을 교장들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며칠까지 생기부 기록을 못 끝내면 봄방학 41조 연수 (봄방학 때 이루어지는 자택근무)를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봄방학을 며칠 앞두고 있었던 교직원 회의에서 교장이 했던 말입니다. 물론 이행하지 않을 거짓 협박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사안의 다급함이 반영된 지시일 뿐이라고 다들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아이들의 생기부에 하나라도 더 써주려고 기 쓰고 있는 교사들일진대 이런 교사들의 마음을 헤아려 '고생하시고 계시지만 가능한 며칠까지 꼭 끝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표현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받아들이는 교사들의 마음도 편치 않아 보입니다. 물론 일부 교사들이 게으름을 피워서 늦추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교사들은 아이들을 위하여 나름 꽤 바둥거리고 있는데 마치 아무것도 안 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처럼 '꼭 저렇게 말했어야 하나'하는 불만의 표시가 여기저기에서 나옵니다. 흔히들 말하는 '말뽄새'가 적절치 않다는 것입니다. 지방학교에 내려와 보니 교장의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지시와 표현으로 인하여 교사들의 감정을 상하는 말들을 자주 듣습니다.
특히 지방 학교로 내려와 보니 관리자들의 ‘군림’ 정도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교사들도 이를 당연하듯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일방적인 수직적 분위기였습니다. 지방에 내려온 첫해 교직원 회의를 접해보고도 깜짝 놀랐습니다. 교직원 회의가 아침 시간에 있다 보니 담임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출석 체크하고 간단한 조회를 하다 보면 늦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렇게 교직원 회의에 허둥지둥 늦게 들어오는 교사들을 보면서 관리자가 대놓고 혼을 냅니다. 하긴 지방의 어느 초등학교 교사는 담임 반 교실 사물함 위치를 바꾸려다 아이들 보는 앞에서 교장 선생님에게 학생처럼 혼난 뒤 결국 1년을 그대로 살았다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어느 학교에서는 특활부 샘이 군부대 위문 방문 기안에 교감, 특활부장을 ‘인솔교사’라는 명칭으로 써놓았다고 ‘교감이 어째 교사냐’고 하면서 ‘인솔교원’으로 고치라는 호통을 치며 기안을 돌려보낸 교감도 있다 합니다. 하긴 교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 어떻게 올라왔는데 감히 교감을 교사와 동일시하는 끔찍한(?) 발상이라니. 교사라는 표현보다 교원이라는 표현이 더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학교에 근무하는 모두를 동일한 교육동반자로 생각하는 나로서는 교사든 교원이든 굳이 차이를 두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교감이 정 못마땅하면 많은 내용수정도 아니고 단지 한, 두 글자 정도는 기안을 직접 수정하는 수고를 해 줄 수도 있는데 굳이 담당교사에게 전화해서 호통을 친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교감이 수정을 하고자 한다면 그 서류에서 몇 자 바로 수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담당교사가 별 의미도 없는 단어를 수정하려면 단지 글자 하나 고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안을 회수해서, 글자 한 자 고치고, 다시 결재자들 입력하고 결재를 올려야 하는 등 무의미한 클릭을 10번 이상 해야 합니다. 본인은 일을 완벽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이를 뒤받침하는 교사들은 정작 중요한 업무를 못 보고 그 일에 소모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교감이나 교장들은 교사 때 정말 완벽했던 것처럼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관리자들일수록 교사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거나, 편하게 다가설 수 있는 자세를 보여주기보다는 지극히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속성을 보입니다. 오죽하면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동아리에서 ‘교장’ 출신이라면 잘 받아주지 않는다는 농담을 하곤 합니다. 자기주장만 하고 지시만 한다는 이유입니다. 교감, 교장이 권위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들 중 하나는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승진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장 승진에 계속 미끄러지면서 ‘죽어야 산다’고 하는 어느 교감의 입버릇처럼 모든 역겨움과 비굴함까지 참으면서 버텨야 승진할 수 있습니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러나 성실히 만 일하면 자동 승진이 가능한 교육청 안에서도 일 때문인지, 승진 스트레스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자살하는 장학사가 있다 하니 역시 만만한 과정이 아닌 듯합니다. 그 힘들은 과정을 겪으며 올라왔으니 정작 교장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그들 마음에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랐는데...’하면서 그 권세를 누리고자 하는 의지가 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정작 교장, 교감이 될만한 자격을 갖춘 교사들은 오히려 승진 과정을 외면하고, 자질이나 능력이 되지 못하는 교사들이 승진 점수만 챙겨서 관리자가 되다 보니 애초부터 관리자와 교사들 간 신뢰 분위기가 형성될 수가 없습니다. 교사들로부터 교장감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억지 권위를 내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절차를 밟아서 오라.'라는 교장이 생겨나는 것이겠지요.
'요새는 을의 갑질이 더 심하다.’
방학하는 날 1박 2일 단합과 소통을 위한 교직원 워크숍을 나간 교사들을 향해 교장이 했던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교사 연수에서 교장이 ‘갑’과 ‘을’의 관계로 교장과 교사를 나누며, 과연 ‘을’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표현을 씁니다. ‘갑질도 심각한 문제지만 요새는 을질 하는 것도 문제다.’라는 발언을 통해 교사들에게 ‘을질’ 하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내가 접한 교사들은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교장 관점에서는 교사들의 행동이 꽤나 맘에 안 들었는가 봅니다. 아니면 혹 승진을 원하는 교사들이 별로 없어서 자신을 극진히 모셔주는 교사들이 없음에 대한 불만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놓고 교사들 앞에서 교장, 즉 관리자와 교사들을 이분화하여 ‘갑’과 ‘을’로 표현하는 교장은 처음입니다. 그것도 단합과 소통을 위한 교직원 워크숍에서 말입니다. 교사들을 동등한 동료로서 존중한다면 감히 내뱉을 수없는 표현입니다. 학생과 교사처럼, 교사와 교장의 관계가 수직적, 위계적 관계로 이미 굳어진 지 오래입니다. 교장과 교사들을 교육적 동료로서가 아닌 갑과 을이라는 종속, 그리고 대립되는 관계로 설정하고 이런 식의 발언을 하는 교장을 보면서 더욱 좌절감이 듭니다. 이 교장에게는 교사는 모두 바람직한 교육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협력하며 나아가는 ‘교육 동반자’라는 개념이 아니라 자신에게 종속된 하위 존재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마 상당수의 교장들이 갖고 있는 마인드가 아닐까 싶습니다.
교장과 교감, 즉 관리자라고 불리는 그들은 수직적 위계 속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게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을 자기 밑에서 일하면서 복종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존재들로 생각합니다. 교사들 위에 군림하고 복종을 기대하는 것이 잘못된 의식이라는 생각을 못 합니다. 수평적 관계 형성이 아닌 수직적 관계를 기대하는 관리자들의 의식 앞에서는 아무리 타당한 소리를 할지라도 단지 건방지고 무례한 교사의 모습으로 밖에 비치지 않습니다. 이들 관점에서는 '을의 갑질'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육적, 건설적 의사소통이 가능한 평등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교장의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자세는 교직사회의 위계구조가 고착화되어 있음에 기인하기도 합니다. 지역 교직사회에서 최상위층은 교육청입니다. 단위 학교에서 정 위계 구조로 본다면 교장이 최상층이고 아이들이 최하층에 속합니다. 현행 제도 하에서는 학교에서 최상위층인 교장은 아이들을, 교사들을 바라볼 필요도 없이 그저 위에 있는 교육청만 바라보면 됩니다. 옛날에 어느 지역의 교장들이 수뢰 혐의로 구속 기소된 교육감의 공판을 응원 방청하다가 재판관으로부터 근무시간임에도 교장들과 교육청 간부들이 재판장에 있다는 따끔한 질책을 받았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오죽하겠습니까? 교육감으로부터 눈도장을 받아야 하는, 교사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교육청과 상급 기관만을 바라보는 교장들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마 관리자들에게는 군림을 당하고, 아이들에게는 군림하는 것이 교직생활 동안 관행처럼 굳어져 익숙해지다 보니 자신들이 관리자가 되었을 때 위의 상급기관에는 순응하고, 교사들 위에서 군림하는 행위를 당연한 듯이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교사 때부터 아이들에게 군림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기에 이미 교사 초기부터 위계적 관계에 대한 의식이 굳어진 결과가 아닌가 쉽습니다.
또한 교장이 손 안되고 코 풀 수 있게 해 주려고 기를 쓰는 교사들 중 승진 대열에 합류한 교사들의 무조건 복종 자세도 이러한 현상을 부추기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특히 교감의 역할이 지대합니다. 교감에서 교장 승진까지 마지막 단계의 전부를 쥐고 있는 최상위층의 교장에게 교감으로서는 교장의 의중을 미리미리 파악하여 자질구레한 모든 것을 알아서 걸러주고, 절대복종해야 하는 교감이 있음으로써 교장의 권위가 더 강해지는 모양새입니다. 교감이라는 자리가 없는 프랑스처럼 우리 교직사회도 교감은 없어도 되는, 아니 오히려 없는 게 더 나을듯한 존재일는지 모릅니다. 물론 제대로 된 교감과 같이 일하게 된다면 훨씬 평교사의 일들이 수월해지는 것이 확실하지만 이런 바람은 현 교직사회에서는 요원합니다. 오히려 평교사의 입장에서 도와주기보다는 교장의 눈치를 보고 평교사들을 조율하고 조절, 통제하기 바쁩니다. 이런 상황은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려고 하는 교장과 같이 일하게 될 때 정점에 달합니다. 교장에게 하나라도 잘 보여서 점수를 따야 하는 교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념이나 의지는 아예 팽개쳐 버린 채 수시로 교장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단지 교장의 의중을 빨리 파악해서 이를 교사들에게 전달하거나 강요하는 식의 역할 밖에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감을 위시한 교사들의 충성스러운 교장 모시기 자세가 지배적인 분위기로 자리 잡게 되면 대부분의 비주류 교사들은 갈등과 대립을 기꺼이 감수할 의지가 아니라면 점차 회피 모드로 자세를 잡습니다. 결국 관리자를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의 부재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