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욕, 수면욕, 성욕 그리고 목욕
흔히들 인간의 3대 욕구라 하여 식욕, 수면욕, 성욕을 이야기하지만 난 한 가지 욕구를 더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목욕] ; 沐 머리감을 목, 浴 목욕할 욕 [한자풀이] 머리를 감으며(沐) 몸을 씻는 일(浴).
글을 시작하기 전에 남들 다하는 목욕이 왜 나에게 특별 해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 아빠 손잡고 주에 못해도 한 두 번은 동네 목욕탕에 가는 게 일상이었고 (이때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줄 알았다.) 여행을 가도 숙소에 목욕탕, 사우나, 스파 시설이 잘 되어있는지를 먼저 찾는 부모님 아래 자라 학습형 목욕러에 가까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목욕은 필요조건일 뿐 필수조건은 아니었다.
나는 올해로 10년 차 서비스직 종사자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을 감정 노동자로 일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나의 진짜 감정은 조금 숨기더라도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진짜 솔직한 내 감정이 어떤지, 지금 나는 어떤 기분인지를 알아차리는 게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고장 났다.
엄청 추운 겨울날 유독 화가 난 손님을 만나게 되었다. 살이 에일 것 같은 바람 때문인지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 때문인지 고객의 날은 매섭게 서있었고 그 칼은 고스란히 말로 나에게 돌아왔다.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내 안의 모든 게 텅 비워진 상태로 동료들의 위로를 받으며 퇴근 후 집에 가는데 눈앞에 <ㅇ 사우나>라는 간판이 보였다. 당연히 목욕탕에 갈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도 안된 상태였지만 '지금 사우나에 가면 따뜻하겠다.'라는 생각에 무작정 들어갔다.
일단 들어는 갔는데 혼자 목욕탕에 간 건 처음인 데다가 이렇게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그것도 집 근처도 아니고! 나 왜 이렇게 충동적이야!? 지금이라도 나갈까??라고 갈등 하는데 정신 차려보니 나의 손에 쥐어지는 불가마 거적.
멍하게 거적을 들고 목욕탕 안으로 입장하자 익숙한 풍경이 있었고 목욕탕 내부 매점 메뉴판을 보자 내 감정이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나 지금 배고파.’
불한증막에 갔기 때문에 맥반석 계란 2개와 베스트 메뉴로 쓰여있는 딸기잼 샌드위치 그리고 아이스커피를 시켰다. 그 옆엔 수입 보정 속옷들과 일회용 목욕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나도 필요한 목욕용품들을 골라 같이 계산했다.
세상에! 이태리타월(내가 좋아하는 핑크색) 쇼핑 만으로도 도파민이 이렇게 분출될 수 있나?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오늘 있었던 일이 마치 전생에서 겪은 일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이제 여기에 온 진짜 목표를 이루러 거적을 뒤집어쓰고 불한증막으로 호기롭게 입장했으나 너무 뜨거워 숨이 턱 막혔다. 안에 할머니 몇 분이 앉아 계셨는데 문이 열려 시선이 집중되어 바로 나가기가 뭐해서 일단 앉았다. 그 안에서는 1초가 1년 같은 인터스텔라 효과가 있었다.
'내가 이렇게 인내심이 없는 건 제왕절개로 태어나서야ㅠㅠ(?)'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속으로 생각하며 나가야지 다짐한 순간,
"아이고 젊은 아가씨가 아주 잘 버티네! 잘한다! 그래 그렇게 독소를 배출해 버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를 향한 뜨거운 응원.
할머니들이 보시기에 어린 나이에 뜨거운 거 잘 참는 게 대견해 보이셨는지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할머니들을 실망시켜 드릴 수 없기 때문에 모래시계가 다 떨어질 때까지 꾹 참았다.
할머니들의 응원 덕분일까? 그 10분을 버틴 것만으로도 내가 굉장히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뜨거운 사우나 안 나가고 버틴 걸로 자존감이 이렇게나 채워질 수 있는 것인가.
한증막을 나와 아까 취향에 맞게 구매한 일회용 목욕용품으로 깨끗하게 씻고 목욕탕 밖을 나서자 하나도 춥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도 그냥 집에 가서 씻고 잤다면 오늘 하루 가장 고생한 나 자신을 위로할 시간은 없었겠지. 나의 유례없는 충동적 행동에 감사해지는 하루였다.
아마도 타의가 아닌 자의로 목욕을 준비하게 된 건 이때부터였음이 틀림없다. 이후에도 수많은 시련들이 날 고장 나게 했지만 두렵지 않았다. 얼른 집에 가서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오늘은 어떤 향의 입욕제를 쓸까. 머리부터 감을까 양치부터 할까 배스타월은 볼타입으로 할까 긴타월로 할까 반신욕 하면서 와인을 마실까 따뜻한 청주를 마실까 등등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준비하고 내가 대접받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렇게 10년 차 목욕러가 된 내가 나의 경험담을 통해 새로운 목욕러 영입, 또는 고인 물 프로 목욕러들의 꿀팁 수집 등 이 이글의 가장 큰 목적이 될 것이다.
생존을 하기 위해 우리는 음식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해야(?) 하고
욕구의 정의가 위와 같다면 식욕, 수면욕, 성욕에 이어 목욕은 나를 나로 생존하게 하는 방법이 될 테니 나의 네 번째 욕구가 맞다.
나는 지금도 목욕이 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