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그러다 보면, 초 집약적 전달력장착이필수적인이 시대의 흐름에 맞춰 춤을 출 수있을지무지개 빛 분수 뿜어대는 고래 등에 실려 다니며 고삐를 움켜쥐고 눈썹 휘날리게 발버둥이나 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섭니다.
다행히, 이 [나란히 걷는 선불교]를 써야 한다는 나름의 의지 덕분에 잠깐이라도 빠져나와 천천히 옛 어른들의 지혜로운 향기가 가득한 글들을 읽다 보면끊어졌던 긴 호흡이 다시 조금씩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가끔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근처 서점을 들러 손에 끌리는 아무 책이나 들고 마치 타로점 보듯이 랜덤 하게 펼친 책장 속 문장들이 마치 활명수처럼 고민을 즉시소화시켜 주는 신묘한 체험들을 하곤 했습니다. 그만큼 정성 가득한 한 권의 책이 가지는 정화력의 힘은 백개의 인스타그램보다 큰 것 같습니다.요즘은 서점 대신 브런치의 다른 작가님들의 좋은 글을 통해 쉬어가기도 하지만,읽는 동안 만은 주변 소음도 안 들리고무릎 아픈 줄 모르고 푹 빠졌던 책을 덮고 뒤돌아나올 때 손끝에 남겨진 글맛의 여운은 늘시원했는데...
언젠가 그 누군가에게 작은 고민 하나쯤은 가벼이 날려버릴 만한밝은 힘이제 글에도깃드는 행운이 오면 좋겠다는 평범한 바람을 가져 봅니다.
지켜보는 것조차 마음 아픈 최근의의료계 문제를 비롯해,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 근본을 상실한 극단적 양극화 현상들이 지속적으로 불거지고 있어그러지 않아도 힘든 경제상황에 더 깊은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SNS를 타고 퍼지는 유행이나 생성형 AI의 발달로 시시각각 모든 것이 빠르고 가볍게 흘러가는 현상은 채울 수 없는 정서적인 결핍과 공허함 버튼을 시도 때도 없이 터치합니다.
'가공된 특별함이 만든 스트레스들'
이렇게 숨 막히는 짧은 호흡의 연속적 상황은,스스로 정서적 자정프로그램을 작동시키려는 반대급부를 불러와 여행, 맛집 투어와 같이 밖으로 해외로 탈출구를 찾아 떠나봅니다.그렇지만 돌아와서 마주한 일상은 변함이 없고 이제 더 이상 외적인 심신 활동으로는 불안정한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 한계에 다다름을 인지하게 됩니다. 누군가는 결국 정신과 치료와 심리상담 그리고 정신치료 관련 약물 복용 등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거나, 자존감이 높은 어떤 분들은 직접적으로 마음 그 자체를 편안하게 다스리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는 쪽으로 활로를 찾습니다.
요즘 선진국 지식인 층 사이에서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는 명상법 즉마음 챙김 혹은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로 명명된 관법수행이 대유행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는 요가가 한창 인기인가 싶더니 이제 조금 더 깊은 생각으로 들어가는 여행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나 봅니다. MBSR (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이라는 체계화된 프로그램은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많이 되면서도 불교라는 종교적 색채를 빼서 좀 더 대중화에 성공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저 마음 챙김과 같은 관법 (위파사나), 간경, 독경, 주문, 절 혹은 염불등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생각을 직접 다스리고 관찰하는 명상에도 많은 수행법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의 비슷한 수행법들도 많습니다.크고 작은 번뇌가 모두 팔만 사천가지라고 하니, 오랜 세월 동안 덩굴처럼 얽히고설키며 자라나 말 그대로 엄청난 경우의 수에 해당하는 번뇌의조합들을 조복 받는 방식이 수행하는 이의 근기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제 막 악업짓는 것을 그만두고 선한 덕을 쌓겠다며 생각을 돌이키는 이부터 오랜 수행으로 거의 마음의 고향에 다다르는 분에 이르기까지저마다 다른 여정행로에 서 있으니 이것이 절대적으로 바른 수행법이다라고 시비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화두참선법은 마음 챙김 등의 다양한 수행 법들과 분명하게 차별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수행 그 자체의 차별 적 지위가 있다라기 보다는 수행자의 입장에서 한 가지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된 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방식들은 모두 여전히 '나만의 특별함'을 마지막까지 지니고 가게 됩니다. 즉, 경전을 읽고 외거나 부처님 명호나 상호를 외거나 주문이거나 그저 바라보는 것이거나 마찬가지로 그 지극함 끝에는 '특별한 경계'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경계는 대개 스스로 최고로 귀하게 여긴 것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경계에 다달아 스스로 '난 성인의 인가를 받고 수기를 얻었다 혹은 난 깨달음을 이루었다'라고 판단하고 만족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어떠한 고요한 경지에 이르러 성성하고도 적적한 상태(sati, 삼매)에 들었다고 했을 때는 관찰되는 대상과 지켜보는 이의 분리되는 상태가 없어지고 말 그대로 대상과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의 경계로 들어갈 텐데 이때의 안온함에 만족해 생각을 그냥 놓아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번뇌업장에 가려진 채 관찰하는 우리의 판단은 여전히 실상을 파악할 수 없는 단계에 머무르기 때문에 자신의 만족감이 곧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쉽고 빠르게 가고싶은 특별한 마음이 또 하나의 장애물을 만든 것입니다. 또, 수행을 거듭하는 와중에 집중하는 생각의 힘이 어떤 경계에 도달하면 신통력 즉 초능력이 생길 수 가 있는데 잘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능력을 쓰는데 유혹되기 쉬운 현상 역시 결국 이러저러한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과거 자신의 생각들이 만들어 놓은 그물에 걸려든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서양인들에게 관법수행을 가르친 틱낫한 스님이 제안하신 interbeing (inter + being,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라는 단어가 좋아서 오래전부터 글자를 변형해서 제 사인으로 쓰고 있습니다. 벌써 10년은 넘게 써오고 있네요. 개인적으로는 interbeing이 브리테니커 사전에 등재되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단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7. 양자量子, 색즉시공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많은 행법들은 그 지극함에 달하면 수행자가 스스로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 '난 깨달았다'라고 셀프인가하고는,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다양한 마장에 사로 잡혀 오랜 세월을 방황할 수 있는 위험성이 늘 도사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에 반해, 화두는 그 자체로 '의심' 한 생각만을 끝까지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짓는 환상에 속지 않고 곧바로 마음의 고향 즉 평상심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반드시 선지식의 점검을 받아야 하겠지만 말이죠.
비록, 마조도일선사(道一禪師) 선사께서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 즉심시불)이며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 평상심시도)라고 하셨지만, 두터운 업장을 뚫고 나의 태양을 만나기란 모기가 무쇠소의 등을 뚫는 정도의 지극함을 요구하는 관문이 있는것은 엄연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