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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철수 Sep 07. 2023

[킴] fire hole

영화 <엘리멘탈>을 보고


앰버와 웨이드의 이야기를 보았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하지만 그래서 더 끌리는 원소들의 사랑이야기였다. 불 원소인 앰버와 물 원소인 웨이드, 그 둘은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을 희생하거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사랑을 해야 할까.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나.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이야기가 떠올랐다. 왜 다른 원소들이 그렇게 반대를 했는지,

불 원소는 왜 자신들 만의 구역이 필요했는지.     


그래, 사실 앰버와 웨이드가 처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100년 전. 엘리멘트 시티에는 이미 불 원소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늘 화근이었던 불 원소들은 다른 원소들의 항의로 결국 fire place라는 자기들만의 구역을 만들었다. 그들은 다른 원소들에게 불이 필요한 상황에만 구역을 나올 수 있었고 이외에는 지옥 같은 불구덩이 속에서 갇혀 지내야했다.

다른 원소들은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fire hole로 보내버린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불을 싫어했다. fire hole은 다른 원소들이 fire place를 비하할 때 쓰는 말이었다. 흙 원소였던 잭 역시 어릴 적 그런 어른들의 농담을 자주 들으며 자랐다. 잭이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친했던 물 원소 친구 제니가 fire place로 들어가는 일이 생겼다. 원소협회에서는 몰래 나온 불 원소가 제니를 납치했다고 결론지었지만 잭은 제니가 fire place를 평소에도 궁금해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니의 책상 서랍에는 fire place로 들어가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 발견되기도 했다.

제니의 장례식 날 잭은 부모님에게 이 이야기를 하며 계획이 적힌 종이를 건넸다. 하지만 부모님은 급히 종이를 구겨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잭에게 조용히 말했다.     

잭, 너는 아무 것도 모르는 거야. 쉿.     

잭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엘리멘트 시티에서의 일상이 편안할수록 제니와 fire place의 원소들이 더욱 생각났다. 결국 잭은 fire place로 가서 제니의 이야기를 직접 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fire place 주위로 담장이 생겼고 협회의 승인을 받아야 지나갈 수 있었다. 특수재질로 된 이 담장을 잭이 넘을 수는 없었다. 담장 앞에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던 잭은 손으로 담을 만져보았다. 뜨거운 화로에 손을 넣은 것처럼 불 원소들의 억울한 열기가 전해졌다. 절망한 잭은 담장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때 누군가의 소리가 들렸다.     

얘, 너 누구니.     

놀란 잭은 주변을 살폈다.     

여기야 여기.     

자세히 보니 담장 아래 조그만 구멍이 뚫린 곳이 있었다. 잭은 구멍 사이에 눈을 맞춰다가 너무 눈이 부셔서 화들짝 놀랬다.     

미안, 자 이제 다시 봐.     

다시 구멍을 들여다보자 먼 발치에서 담장을 보고 있는 밸라가 보였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어.     

잭의 이야기를 들은 밸라는 얼른 부모님을 불러왔다. 두꺼운 담장, 작은 구멍을 사이에 두고 잭은 제니의 이야기와 함께 사과를 전했다.

불 원소들 중 특히 화가 많았던 밸라의 부모님은 다른 원소들과 힘을 합쳐 담장을 녹이기 시작했고, 이대로는 살 수 없다며 협회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잭의 이야기도 함께 협회로 전했지만 어린 아이의 증거 없는 말이라며 무시당할 뿐이었다. 화가 난 불 원소들이 힘을 합치자 특수 재질로 된 담장조차 조금씩 녹아 내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른 원소들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져갔다. 결국 협회에서는 난동을 부리는 불 원소를 처형하기 위한 수조를 제작했고 결국 밸라의 부모님은 모든 원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수조에 빠져야했다. 그때 밸라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밸라가 다른 원소들을 싫어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엘리멘트 시티를 떠날 수도 있었지만 밸라에게는 시티에 머물러야하는 이유가 있었다.     

밸라 부모님의 공개처형 이후 불 원소들은 겁에 질린 채 쥐죽은 듯 살았고 다른 원소들은 마치 도구를 이용하듯 불 원소를 노예처럼 부렸다. 간혹 원소를 위한 원소권단체에서 불 원소의 권리보호를 위해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협회를 포함한 대다수의 원소들은 불 원소의 위험성을 운운하며 그들의 탄압을 당연시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원소권단체의 시위는 점점 켜져갔고 10년이 지난 후, 원소협회 앞 대광장을 가득 메울 만큼 큰 시위가 일어났다. 잭은 ‘1차 불의 집회’라는 현수막을 들고 대광장 무대 위에 올랐다. 광장에는 물과 흙, 공기 원소들이 각기 모여 밸라 부모님의 죽음을 추모했다. 플랜카드에는 “NO hole, YES place” 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뉴스로 fire place의 불 원소들까지 그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었지만 어느덧 20살이 된 밸라는 시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다른 원소들의 가식적인 행동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밸라는 엘리멘트 시티를 모두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화약을 제조하고 있었다. 흙 원소들에게 화약을 뿌려 뜨거운 유리로 만들고 그 뜨거운 유리를 물 원소들에게 부어서 물을 모조리 증발시켜버릴 계획이었다. 그의 계획에 맞춰 fire place의 담장을 철거하라는 협회의 결정이 내려졌고, 담장을 철거하는 기념비적인 날 모든 원소가 담장 앞에 모여 철거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잭도 있었고 담장 반대편에는 화약가방을 들고 있는 밸라도 있었다. 철거식이 시작되고 담장이 조금씩 녹아 낮아지고 있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던 잭과 밸라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담장이 모두 사라지자 원소협회장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밸라는 가방에 손을 넣고 몰래 화약 하나를 꺼내려 했다. 그때 심지에 불이 붙자 맞은편에 있던 잭이 밸라를 발견했다. 잭은 밸라에게 뛰어가서 가방을 뺏고 흙을 뿌려 화약이 터지기 전에 심지에 붙은 불을 급히 껐다. 타는 냄새가 조금 나기는 했지만 다른 원소들이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다.

밸라는 잭에게서 가방을 뺏어 도망갔고 잭은 그 뒤를 따랐다.     

잠깐 멈춰봐,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어?     

잭이 밸라를 먼저 알아보았지만 밸라는 말없이 뛸 뿐이었다.     

멈춰보라구!     

계속해서 잭이 따라오자 밸라는 가방에서 화약하나는 꺼내 불을 붙이고 잭에게 던졌다. 폭발음과 함께 주변의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생각보다 큰 소음에 놀란 것은 밸라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을 뒤덮었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천천히 잭에게로 다가갔다. 잭의 심장이 유리로 반짝이고 있었다.     

미안해.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굳어버린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으며 잭이 말했다. 그의 사과에 밸라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부모님이 수조 안에서 꺼져갈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지난 20년을 떠올리며 하염없이 뚝뚝, 밸라를 타고 흘렀다. 금새 증발되던 눈물이 점점 많아지자 끌어안고 있던 화약심지가 모두 젖어버렸고 밸라의 불씨도 크게 흔들렸다. 모습을 지켜보던 잭은 아직 굳지 않은 손을 이용해 땅을 짚고 밸라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꼭 안아 주었다.     


폭발 소리를 듣고 뒤늦게 원소들이 몰려들었다.

그 자리에는 다 녹아 버린 화약가방과 온 몸이 투명하게 굳어버린 잭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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