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
2021년 8월 14일 토요일, chuls203에서 '피아니스트'를 관람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피아노 연주자의 이야기라는 것만 알고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폴란드 방송국에서 연주를 하던 블라디슬로프(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은 폭격을 겪고 피신한다. 독일군이 바르샤바까지 점령하면서, 블라딕의 가족은 유대인으로서의 핍박을 받는다. 재산 축소를 시작으로 유대인 거주구역으로 이주를 당하는 등 수난을 겪는다. 블라딕을 제외한 가족들이 돌아올 수 없는 기차로 수용소로 보내졌고, 블라딕은 지인들을 통해서 여러 집을 전전하며 근신한다. 폴란드인들과 러시아군이 독일군을 향해 반격하자, 바르샤바는 폐허가 된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블라딕은 우연히 독일 장교에게 은신처를 들통나게 된다. 피아니스트였다는 블라딕의 이야기를 들은 장교는 그에게 연주를 명령하고, 그의 연주가 시작된다. 과연 이 연주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의 연주들
His performances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블라딕의 연주가 들린다. 그는 폴란드 방송국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하지만 점점 다가오는 폭격에 직원들이 도망가기 시작하고, 결국 폭격에 창문이 깨지자 그도 연주를 멈춘다. 피아니스트였던 그의 연주가 중단되듯, 유대인을 포함한 전쟁의 피해자들의 삶도 정지된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연주도 무언가에 의해서 방해를 받는다. 집에서 악보를 보며 작업을 하던 블라딕은, 유대인들의 거주구역이 정해졌다는 신문기사 때문에 피아노에서 손을 뗀다. 이후 그는 생계비를 위해서 피아노를 처분한다.
'Cafe CAPRI'라는 이름의 유대인 식당에서 블라딕은 다시 연주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 중에서도 돈이나 특권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식당 밖에서는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버젓이 길가에 버려져있는 장면과 비교해본다면, 그의 연주는 일부를 위한 음악이다. 이전에 방송국에서 연주하던 그의 음악과는 대척점에 있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방송국의 전파를 타는 블라딕의 연주에는 벽이 없으며, 모두가 향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손님의 요구에 따라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되기도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블라딕의 연주는 들리지 않는다. 그가 일하던 식당에 피아노는 그대로 있지만, 연주를 들을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강제노동을 하며 버티고 있던 그는, 유대인이 아닌 친구들과 연락이 닿는다. 그 친구들은 블라딕을 감춰주기 위해서 많은 위험을 무릅쓴다. 그를 책장 뒤 비밀공간에 하룻밤을 재워주기도 하며, 그가 머물 수 있는 집을 구해주기도 한다. 그 집에서 블라딕은 피아노와 다시 만난다.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인다. 하지만 이는 건반의 공중에서 펼쳐지는 연주였기에, 그의 머릿속에만 음악이 울려 퍼질 뿐 그 누구도 음악을 들을 수 없다. 그의 연주는 이제 시작되지도 못한다.
그의 연주가 다시 시작된 것은 독일 장교 빌름 호젠펠트의 명령 때문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통조림 하나 들고 다락방에서 은신하던 그는, 호젠펠트에게 걸린다. 장교는 피아니스트였다는 블라딕의 말을 듣고 연주를 요구한다. 영화에서 처음으로 곡이 완주된다. 호젠펠트는 블라딕을 살려준다. 블라딕의 연주가 그들 감동시켰다고 볼 수도 있지만, 완전한 호의라고는 할 수 없다. 이미 연합군이 독일을 옥죄고 있었고, 러시아군이 바르샤바 근처까지 당도했기 때문이다.
호젠펠트의 예상처럼 전쟁은 곧 끝나게 되고, 독일은 패전한다. 이후 두 번의 피아노 연주가 더 나온다. 영화의 시작처럼 방송국에서 연주하는 블라딕의 모습이 나온다. 그는 호젠펠트의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친구와 눈빛을 교환하는데, 처음에는 서로 미소 짓던 둘이 이후에는 다소 슬픈 표정을 보인다. 그들이 해방된 후 일상으로 돌아가 나눈 대화가, 이 연주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마지막 곡은 공연장에서 연주된다. 이젠 그에게 연주를 명령하는 장교도, 연주를 중단시키는 방해도 없다. 하지만 그는 음악 외에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잃어버렸다. 다시 찾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전체주의와 사람들
Totalitarianism and the people
개인들은 국가(전체)에 속해있어야만 의미가 있으며, 강력한 국가권력이 이런 개인에게 간섭할 수 있다. 독일의 나치즘은 전체주의에 기저를 두고 다른 나라들을 침공했으며,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 영화에서는 그 전체주의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그러한 국가 속의 개인들은 어떤 행동을 하는가?
유대인 경찰로 나오는 이츠학 헬러부터 살펴보자. 유대인 경찰이란, 독일군이 유대인을 더 용이하게 다루기 위해서 같은 유대인을 뽑아 만든 경찰들이다. 이들은 같은 인종인 유대인을 검문하고 취조할 수 있다. 심지어 수용소로 보내지는 기차 안에 유대인을 태우는데 경비를 서기도 한다. 유대인 또한 나치즘의 명령을 따르면,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인정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유대인 경찰도 해산하고 이들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도 학살당한다. 이츠학 헬러는 슈필만 형제에게 유대인 경찰이 되라고 권한다. 형제는 이를 거절하지만, 이츠학은 블라딕이 수용소 가지 못하도록 유대인 행렬에서 몰래 빼낸다.
다음은 유대인이 아닌 바르샤바 시민들이다. 이들은 다양한 형태로 그려진다. 블라딕이 은신처에서 접시들을 와르르 깨자, 옆집에 사는 사람은 경찰을 부르겠다고 소리를 지른다. 이에 놀란 블라딕이 문을 열고 도망치자, 이 이웃은 블라딕을 잡고 늘어지고 유대인이 도망친다고 소리를 지른다. 이런 사람들은 전체주의 속에서 적응하여 살아가던 민간인이다. 국가권력에 협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증명한다.
유대인의 해방을 돕는 바르샤바 시민들도 등장한다. 블라딕을 숨겨주던 지인들을 포함해서, 시내에 위치한 군 병원을 공격하는 의병도 있다. 이들의 목적은 독일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다. 전체주의를 부정하며, 가학적인 군사국가를 타파하려고 한다.
블라딕을 숨겨주지만, 결국엔 그를 배신한 방송국 기술자도 등장한다. 그는 임시 거처에 있는 블라딕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며, 잘 살피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블라딕의 명성을 이용해서 모금 받을 뒤, 그것을 갖고 사라진 것이다. 그 때문에 블라딕은 건강이 안 좋아져서 죽을 고비를 넘긴다.
마지막으로 독일군 장교인 빌름 호젠펠트가 있다. 블라딕이 숨어있던 건물이 독일군의 작전부로 사용되기 하루 전에, 호젠펠트는 블라딕을 발견한다. 피아니스트였다는 블라딕의 말을 들은 장교는 그에게 연주를 명령한다. 그의 연주를 들은 후, 장교는 블라딕에게 음식과 덮을 옷을 준다. 그는 전체주의의 중요한 일원이었지만, 유대인을 두 눈으로 보고도 살려준다. 그가 이전에 유대인을 얼마나 많이 학살했는지, 혹은 눈감아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더군다나 패전이 목전으로 다가오는 것을 그는 체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블라딕을 놓아주는 그의 행위가 선행이라거나 인류애라고 바라볼 수는 없다. 영화의 후반부에 자신이 포로로 잡혀있다며 도움을 부탁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어쩌면 패전을 앞두고 살아나갈 구멍을 만든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다만 전체주의에서 국가를 따르지 않는 행위를 했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는 인물이다.
독일의 나치가 많은 학살을 저지르고, 평화를 타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체주의보다 소신에 따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존재했을 것이다. 전체주의 반대에 서는 인물들이 이 영화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전체주의는 국가를 따르지 않는 개인을 처리하는 것에 발이 묶이지만, 그 개인의 존재가 바로 개인주의에선 시발점이 된다.
호랑이굴
Lions's den
슈필만 가족은 재산의 최대 범위를 설정해서 초과되는 돈을 빼앗아 가겠다는 독일군의 통보를 받게 된다. 그들은 초과된 돈을 어디에 숨길지 의논한다. 화분 안쪽에 숨기자, 식탁의 다리를 파내고 그곳에 숨기자는 의견이 나온다. 이에 헨릭은 식탁 위에 돈을 올려두고 신문지로만 덮어두자고 말한다. 이른바 '등잔 밑이 어둡다' 작전이다. 이에 블라딕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이 작전은 블라딕의 지인들이 그를 숨겨주면서도 사용한다. 그의 임시 거처를 독일 진영의 핵심부에 마련한 것이다. 창문에서 바로 보이는 건물은 독일 병사를 위한 군 병원이었고, 그 옆은 경찰국이었다. 그들은 그곳을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말한다. 이후 블라딕과 호젠펠트가 만났던 건물의 위치도 이와 비슷하다. 폐허가 된 바르샤바에서 비교적 온전한 건물에 독일군은 임시 작전부를 만든다. 유대인 블라딕이 이 건물에 숨어있는 것을 호젠펠트는 알았지만, 그를 계속 그곳에 머물도록 한다. 이전에 지인들이 블라딕을 돌보듯이, 음식을 가져다주고 전쟁에 대한 소식도 전달해 준다.
블라딕 가족은 결국 바이올린 안에 돈을 숨기기로 했었다. 많은 물건들을 독일에 빼앗겼지만, 이것만은 사수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 앞에서 독일군은 기어코 바이올린을 앗아갔다. 등잔 밑이 어둡다면, 등잔마저 치워버리는 것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촛농이 아무리 흘러내려도, 그들에게 떨어질 리 없으니 상관없는 것이었다.
반면 뜨거운 촛농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불이 붙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블라딕의 지인들은 그를 돌본다. 이후에 만난 호젠펠트 또한 작전부를 철수할 때까지 그를 살려둔다. 여기서 진영 한가운데에 유대인이 있어도 모르는 독일군이 어리석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진영의 중심이 아닌 곳에는 이미 숨을 곳이 없었을 정도로 처참한 현실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2021년 08월 14일 chuls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