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Dýrið, Lamb, 2020)
2022년 1월 6일 목요일, CGV 오리에서 '램'을 관람했다. '경계선', 'A.I.' 등 여러 가지 영화가 동시에 떠올랐다. 이 영화들은 언제나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영화를 보는 것은 늘 즐겁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마리아'와 '잉그바르'는 목장에서 양들과 함께 살아간다. 어느 날 이들 부부는 평소처럼 새끼 양의 탄생을 맞이한다. 그들은 한눈에 새끼 양이 부부를 위해 태어난 선물이라고 확신하고, 목장이 아닌 집에서 보살핀다. 새끼 양은 '아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부부의 침실에서 함께 잠을 청한다. 하지만 어미 양이 아다가 보이는 창문으로 찾아와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어미 양과 엄마
What makes a lamb a human
아다는 양의 몸에서 태어났다. 이는 마리아와 잉그바르뿐 아니라 관객도 목격한 사실이다. 하지만 부부는 아무 의문은 품지 않고, 아다를 그들의 자녀로 받아들인다. 부부는 아다에게서 '인간' 아이의 모습을 알아본 것이다. 이렇게 아다는 출생과 성장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운명이 된다.
마리아와 잉그바르는 목장 일을 하며 능숙하게 양의 출산을 도와왔다. 새끼 양들이 태어나 네 발로 일어서는 것을 확인할 때, 안도의 미소를 짓기도 했다. 어미 양들은 이런 새끼 양을 혀로 핥고 품는다. 그리고 양이 조금 자라나면 귀를 조금 잘라내고, 숫자가 적힌 이름표를 달아주었다. 표식이 생기는 순간부터 양들은 이 부부의 소유이며, 그들의 재산이 된다. 이에 더해서, 부부는 이 표식을 통해서 양들을 구분할 수 있다. 목장에는 이렇게 부부 그리고 어미 곁에는 새끼 양이 함께 살아간다.
아다는 목장의 다른 양들과 매우 분명하게 구별된다. 이는 외적인 특징뿐 아니라, 아다가 태어나자마자 인간으로서의 형식에 맞춰졌기 때문이다. 다른 새끼들과 다르게, 아다는 수건 혹은 담요로 감싸진다. 마치 태아가 출생했을 때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아다는 양들이 자라는 축사가 아닌 인간의 집에서 키워진다. 그러면서 당연히 어미 양과 따로 떨어져서 자라게 된다.
물론 이 특징들이 나타나는 동물들이 더 등장한다. 이 집 안에는 개와 고양이도 살고 있는데, 이들도 축사 혹은 들판에 있는 양들과는 구별된다. 이들은 인간들의 영역 안에서 생활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양식은 인간의 것과 다르다. 고양이는 인간과 같은 위치에서 식사하지 않으며, 개의 경우에는 실내보다는 실외에 가까운 창고에서 생활한다. 이에 비해 아다는 부부와 함께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마리아와 목욕을 하는 등 공동생활을 한다.
흔히 동물이라 불리는 존재들과 아다는 외적인 특징으로 가장 크게 차이가 난다. 아다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두 발로 서서 걸을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옷을 입는다. 또한 아다의 내적인 특징은 부부로 하여금 아다를 자녀로 강하게 인식하게 만든다. 아다는 부부의 말을 알아들을 뿐 아니라, 자신만의 감정을 갖고 있고 더 나아가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다는 완전한 인간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잉그바르의 형 '피에튀르'가 집을 방문하고 아다를 마주했을 때에, 그의 눈앞의 아다는 그저 두 발로 설 줄 아는 짐승이다. 부부가 아다에게 아이의 옷을 입힌 채 소꿉놀이를 하고 있다고 속단한다. 그는 아다를 양처럼 대하고, 집에서 쫓아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결국 아다는 경계선에 서있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 경계선으로 인해 구별되는 것은 비단 아다뿐만이 아니다. 아다의 탄생으로 인해서 아다의 어미 양과 마리아가 뚜렷하게 구별된다. 물론 인간과 동물이라는 경계였다면 아다의 존재와 무관하게 이미 다른 '종'으로서 분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이야기해 볼 경계선은 '모성' 혹은 '부성', 즉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어미 양은 부부가 아다를 데리고 간 이후로 꾸준히 집 앞으로 찾아와 울음으로 새끼를 찾는다. 이에 더해 어미 양은 부부가 한 눈을 판 사이에 아다를 데리고 도망가기도 한다. 아다를 품에서 지키고 싶은 이런 마음은 마리아도 갖고 있다. 이는 동물과 사람 양쪽 모두에게서 포착된다. 하지만 인간인 마리아는 어미 양에게 분노와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어미 양을 없애버리고자 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다를 양으로 대하려던 어미 양. 아다를 인간으로 대하려던 마리아. 이들은 아다의 부분을 전체로 만들려고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어느 날 아다에게 일부가 아닌 '아다'라는 존재 자체로 재인식되는 일이 일어난다. 아다만의 특징을 오롯이 공유하고 있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이 존재는 아다를 양으로도, 인간으로도 바라보지 않는다. 혹은 정반대로, 양으로도, 인간으로도 바라본다. 이 존재는 어미 양처럼 아다를 곁에 두고 싶어 했으며, 인간처럼 복수심을 폭발시킨다.
그 이름을 가진 자와 이름이 없는 자
Fable
이 영화에서는 '이름'이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다. 소수의 인물만이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고양이와 개는 부부와 매우 친밀하지만, 이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이름은 이렇게 인간의 '자격'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름이 처음으로 불리는 것은 [제1장]의 막바지다. 그 이후로도 이름은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그 작은 순간들이 전반적인 비유를 담당한다.
먼저 새끼 양에게는 표식 속 숫자가 아닌 '아다'라는 이름이 생겼다. 아다라는 이름의 뜻이 궁금해졌지만, 그 뜻을 모르더라도 이름을 부여받는 것만으로도, 아다가 충분히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마리아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제서야 아다를 부부에게 주어진 선물로 여기는 그녀의 마음이 납득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이 크리스마스였다는 것 또한 상기된다. 하지만 늘 그렇듯 아무리 강한 비유가 등장하더라도, 그것이 그 영화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비유를 가져온 이유, 그리고 그럼으로 인해서 무엇이 새롭게 보이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제3장]이 열리고, 마리아와 잉그바르 부부에게는 먼저 떠나보낸 자녀가 있음을 관객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이름이 지금의 새끼 양에게 부여되었다. 마리아는 새끼 양을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인 것뿐 아니라, 자신이 간직하던 과거를 현재로 불러온 것이다. 새끼 양을 위해 설치했던 요람 그리고 옷들은 모두 이전의 아다가 남긴 것들일지도 모른다.
아다는 부부에게 찾아온 선물이자 새 출발을 의미한다고 마리아는 생각한다. 크리스마스는 탄생이자 시작이기에 마리아의 의견은 좀 더 의미가 생긴다. 아다는 마치 아기 예수처럼 부부에게 환영받는다. 하지만 이 출발은 미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슬픔이나 과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재시작에 가깝다.
많은 단서들이 이 영화를 성경처럼 보이게 하지만,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아다가 양과 인간의 모습이 혼재한 것처럼 보이는데, 영화 속 인물 중 누구도 그 원인에 대해서 고민해 보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불쾌한 골짜기와 같은 당혹감을 안겨준다. 양과 사람의 모습이 동시에 보이는 생명이 태어났다면, 직관적으로 수간(사전적으로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필자는 이를 배제하고 행위 자체를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을 떠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소 합리적인 추측으로 보이지만, 이내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자가 등장한다. 앞서 양을 포함한 동물들에게 이름이 없던 것과는 다른 이유로 이 존재에게는 이름이 없다. 이후 그 존재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에게 아다처럼 이미 존재하는 이름을 붙여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 혹은 무명의 의미를 되돌아볼 것인가.
시간 여행
Two Kinds of Pasts
마리아와 잉그바르는 시간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잉그바르는 현재가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에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자 마리아는 과거에 대한 시간 여행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들은 과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듯 보인다.
마리아에게는 두 가지의 과거를 갖고 있다. 첫 번째 과거는 아다로 표현되는, 돌아가고 싶은 과거다. 그녀는 먼저 세상을 떠난 자녀의 이름을 다시 불러왔다. 물론 여기서 더 엉뚱하게 읽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세상을 먼저 떠난 아다 역시 마리아가 낳은 생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지금의 아다와 비슷한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부부는 고요한 목장에서 적막하게 살아왔다. 목장의 상황을 되돌아보며, 올해는 작년보다 나아졌고, 작년은 또 재작년보다 나아졌다고 여기며 그들의 상처가 조금씩 아무는 것을 지켜봤다. 아다가 집으로 온 이후로는 긍정적인 변화들이 생기는데, 둘의 대화가 늘었고 부부 사이의 감정과 관계도 이전보다 활발해졌다.
두 번째 과거는 피에튀르라는 인물로 나타나는, 묻어두고 싶은 과거다. 과거에는 좋았을지 모르는 기억이지만, 현재에는 이를 청산하고 잊고 싶어 한다. 그녀는 피에튀르가 나타나자 반갑게 인사를 하지만, 그가 몰래 속삭이는 과거의 일들을 당황스럽고 불쾌하게 여긴다. 이 과거는 비교적 최근까지 포괄하는데, 피에튀르는 그녀가 어미 양을 어떻게 대했는지 들춰내기도 한다. 마리아는 때로는 일목요연하게, 때로는 완강하게 피에튀르를 거부한다.
잉그바르에 따르면 시간 여행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전적으로 시간여행자에게 달려있다. 마리아처럼 과거를 불러올 수도 청산할 수도 있다. 그로 인해서 바뀌는 것은 반드시 있어 보인다. 이는 영화라는 예술도 마찬가지다. 영화에 관련된 행위들은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과 유사하다. 영화를 만들거나 관람할 때 우리는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관객들은 마리아처럼 그 변화를 감당해야 한다. 이 영화가 다소 난해하고 실망스러웠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아다를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마리아는 새로운 존재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워한다. 이 영화를 온전하게 이해하러 온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마리아일 수 있다.
2022년 01월 06일 CGV 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