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너머에(Beyond You, 2020)
2021년 9월 8일 수요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그대 너머에' 시사회에 참석했다. 역시나 포스터만 보고 나서 관람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해당 시사회는 키노라이츠에 응모 및 당첨되어 참석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는 '경호'에게 '지연'이 나타나, 자신이 그의 딸이라고 말한다. 경호는 이를 부인하며, 지연의 어머니인 '인숙'과는 그저 대학 동창 사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연이 그를 찾아온 이후로,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난다. 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날 때 경호는 관찰자일 뿐, 모든 상황은 그 없이 돌아간다. 경호는 지연을 찾아가 이렇게 된 연유를 묻자, 그녀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인물은 어떤 길잡이인가
Can we trust the protagonist
영화가 관객을 불러들인 공간은 어린 시절부터 천천히 자라온 동네보다는, 하루아침에 도착한 낯선 여행지에 가깝다. 관객들은 마치 방금 태어난 아기 오리처럼, 어떤 음성과 얼굴을 따라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일종의 주인공 선별작업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러 명의 인물들이 나타나도, 본능적으로 우리는 주인공을 찾을 수 있다. 영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우리는 주인공의 상황에 동화되어 들어간다. 혹은 중립적으로, 반동적으로 영화를 바라본다. 인물에게 이입하든 아니든에 상관없이, 그 가운데에는 인물들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낯선 곳에 떨어진 우리들의 길잡이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길잡이들이 모두 같이 친절하고 명확한 것은 아니다. 감정을 솔직하게 내비치는 주인공을 따라가는 것은 굉장히 쾌적한 여행일 것이다. 주인공의 선택을 공감하거나 비판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수월한 가이드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주요 인물의 말이나 행동의 동기나 시간적 순서를 파악할 수 없다면, 우리를 미로로 안내하는 인솔자를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해 볼 영화의 주요인물들은 어떤 가이드일까? 관람객들에게 매우 복잡한 자신의 지도를 보여주며, 다양한 해석을 들어보려는 안내자로 생각된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눈앞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지기도 하며, 반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기도 한다. 지연을 뒤쫓아가던 경호가 막다른 길에서 그녀를 놓쳐버리기도 하고, 닫힌 화장실 문을 통과한 지연이 욕조에서 경호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경호의 직업도 가담한다. 감독인 경호가 지연과의 일화를 시나리오에 적기 시작하면서, 지연이 경호를 찾아온 것이 먼저인지, 혹은 경호가 지연을 만들어 낸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만 따라가며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언뜻언뜻 보이는 샛길처럼, 주변 인물들이 눈에 들어올 수도 있다. 하지만 경호의 주변 인물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연은 경호로 인해서 상상의 인물로 보이기 시작한다. 지연의 어머니로 나오는 인숙은 어떠한가? 기억력과 관련된 질병을 앓고 있는 그녀 또한 확실한 이정표로 볼 수는 없다. 나머지로 등장하는 인물들도 별반 차이가 없다. 이제 우리는 이 영화 속 인물들 중 단 한 명도 신뢰('신뢰'란, '진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물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또한 아니다.)할 수 없음을 느낀다. 오히려 인물은 우리에게 변수로 다가온다.
이제 인물들이 제시하는 지도를 다시 바라보자. 여전히 그 지도를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길 하나하나를 선택해서 직접 다녀볼 수 있는 생각의 기회를 얻었다. 스스로도 다양한 경로를 그려볼 수 있으니, 여행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의견을 나누면 이야기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물론 이런 인물들 때문에 '불친절한 영화'라고 말하며 비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내선을 짙게 그려주는 인물, 그리고 그 선을 꼬아버리는 인물의 여부가 영화의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다. 똑 부러지는 안내를 받는 여행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며, 길을 잃어본 경험이 시종일관 불쾌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개미의 생각
Interpretations
이런 인물들의 말소리와 함께, 화면 가득 클로즈 업된 개미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 경호는 개미들을 관찰, 개입, 촬영, 그리고 해석한다. 이렇게 하는 까닭을 물어보는 질문에, 경호는 늘 해오던 것이라는 듯이 대답한다. 긴 시간이 흐르고, 인숙은 경호에 대한 기억을 글로 남긴다. 이 글을 읽은 인숙의 딸 지연이 경호에게 나타나, 자신이 경호와 인숙의 자녀임을 말한다.
지연이 경호를 찾아오던 날, 경호는 제작자에게 시나리오를 들고 갔었다. 자신의 생각을 장황하게 써오지 말고, 남들이 재밌어하는 이야기를 적어보라고 제작자는 경호에게 조언했다. 경호는 그저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적은 것이라고 말하며, 남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화를 내며 반문했다. 하지만 그 답을 얻지 못한 경호는 작가에게 시나리오를 부탁했다. 그러자 작가는 스스로 자신을 촬영해 보는 것이 어떨지 제안하며 시나리오 작업을 거절했다.
놀랍게도 그 하루가 경호에게 한 번 더 반복된다.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자 지인에게 찾아간 경호는, 이전처럼 지인과 대화한다. 하지만 이상함을 느낀 경호는 대화를 멈추지만, 지인은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경호와 대답한다. 경호는 자리를 옮겨가며, 반복되는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한다. 경호의 관찰 대상이 개미에서 주변 인물들로 확장된 것이다. 반복되는 하루를 따라서 인숙과도 다시 한번 마주한다. 경호는 이런 인숙을 바라보며, 그녀는 무슨 심정이었을지 생각해 본다.
경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대 너머에' 각본을 쓴다. 여기서 '그대'를 '한경호' 자신으로 해석할 수 있도 있고, 경호와 마주했던 사람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대'가 가리키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자신 너머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들 곁에 있음으로써, 이야기를 완성시켰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괴이한 경험 속에서 경호는 정작 본인과는 마주할 수 없다. 즉 자기 자신만은 관찰할 수 없는 것이다. 본인의 이야기를 고집하던 그였지만, 그가 결국에 적은 글은 '본인 너머'의 세상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본인 중심으로 적으려던 그는, 자신의 주변으로 세상을 넓혀갔다.
기억과 기록
Memory and Record
경호, 인숙 그리고 지연은 기억과 기록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한다. 먼저 경호는 기억은 기록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고 기록이다. 하지만 기록과 다르게 기억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같은 일을 겪는다고 해도, 인숙은 세세하게 기억하는 한편, 경호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호는 기억은 불공평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경호는 기억을 '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여긴다. 그는 지금껏 인숙을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왔으니, 인숙도 그렇게 지내라고 한다.
인숙은 기억을 어떤 형태로든 꺼낸 것이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더듬어 기록을 시작한다. 하지만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기 때문에, 그 기억이 정확한 지에 대해서는 인숙조차 확신할 수 없다. 글 외에도 인숙은 여러 가지 기록들을 소중히 여기며 보관한다. 경호와 찍은 영상 테이프, 지연과 찍은 사진들이 그러하다. 인숙의 기억의 형태는 종이에 적힌 글로 묘사된다. 기억이 희미해지면 그녀의 기록도 영향을 받는다. 지연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면, 모녀가 찍은 사진 속의 지연의 자리가 가위로 오려낸 것처럼 텅 비어버린다. 글로 적어두었던 기억 또한 점차 지워지고 결국 텅 빈 종이만이 그녀의 머릿속에 쌓여있다.
지연은 기억 없는 기록에 대해 회의적이다. 기록은 곧 흔적이지만, 기억이 없다면 의미 없는 자국일 뿐이라고 치부한다. 치매 때문에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가, 자신을 잊어간다. 분명 자신은 실존하고 있지만, 기억에서 지워지는 경험은 존재에 대해 의심하게 만든다. 반면 일생을 함께 살아온 어머니지만, 인숙은 지연을 잊어가는 대신 경호에 대해서 계속해서 기억해 낸다. 그래서 그녀는 경호를 궁금해하고 원망한다. 자신은 사실 인숙의 글에만 존재하는 인물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이에 경호는 자신이 지연을 기억하고 있으니, 틀림없이 지연은 기억이자 기록이라고 말한다.
세 인물에 따르면, 기억은 기록되어 실재하기를 원하고, 기록은 기억으로 뒷받침되기를 원한다. 기억과 기록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견 또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완전하게 구분되는 개념도 아닌 것이다. 기억과 기록은 서로가 얽혀서 더욱 단단해지는 불가분의 관계다. 경호는 과거에 지워냈던 인숙과 지연의 기억을 시나리오를 통해 다시 되살린다. 인숙은 사라져 가는 기억을 놓아줄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지연을 지워낸다. 그리고 지연은 기억과 기록이 구분되는 지점에 위태롭게 서있다.
2021년 09월 08일 CGV 용산아이파크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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